예상밖의 면접관
"아니 크리스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러니까, 그게 2010년도였나? 미안해, 너무 오래전의 일 같다. 나 너무 나이 들었나 봐."
기억이 잘 안나는 게 분명한 그는, 종이인형처럼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이전의 크리스가 아니었다. 말끔한 남색 옥스포트 셔츠가 걷어 올라간 팔에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갈색 가죽 시계가 은은하게 빛이 났다.
"너 이제 진짜 건축가 같아"
"하하,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된 것 같은데 진짜 건축가도 되고 아빠도 된 크리스를 디진잡스(dezeenJobs)에서 보았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의 작업들이 멋지고 대단해서 지원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홈페이지의 니 얼굴을 봐버렸고 그러지는 않았다고. 눈이 동그랗게 된 크리스가 자신의 핸드폰의 키패드 화면을 내 앞으로 밀었다.
"장난해? 니 번호 좀 줘. 우리는 좋은 디자이너를 찾고 있어. 그게 아는 사람이면 더 좋지."
크리스는 다음 날 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안녕 춥다물! 어젯밤 (다시)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네 포트폴리오와 CV를 보내고 싶다면 아래 이메일로 보내줘. 그리고 다음 주에 시간 정해볼까? 내가 20일부터 3주간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그전이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첫 번째 면접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포트폴리오를 보내고 바로 다음 주에 면접이 잡혔다. 아이패드에 디지털 파일을 넣고, 포트폴리오 전체를 책으로 제본한 아날로그 파일도 챙겼다. 건축은 첨단으로 발전되었지만 아직 아날로그 방식을 감사할 줄 아는 분야 중 하나다. 그리고 내가 일을 함께 할 사람들이 그것을 감사할 줄 아는 유형인지 나도 간을 봐야 하니까 테스트용으로 여러 가지 내가 좋아하는 필기구와 함께 항상 챙긴다.
사우스런던의 펙헴(peckham)은 이전엔 위험지역으로 분류되던 지역이었지만 예술 학교가 생기고 젊은 예술가들이 거리의 분위기를 바뀌면서 지금은 그 멋과 위험, 두 가지가 공존하는 곳이다. 멋있는 것과 위험한 것은 항상 서로를 끌어당기니까. 그레피티가 그려진 좁은 골목을 지나니 오래된 공장을 개조해서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쓰이는 힙스터 자석 같은 멋진 건물이 나왔다. 링컨스미스 건축사무실이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요가와 카페를 함께 운영하는 1층에 자리를 잡았다. 면접에 늦을 수는 없기에 1시간 일찍 도착했지만 영국에서는 약속시간에 일찍 도착하는 것보다 제시간에 도착하는 것을 더 매너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4층에 있는 사무실 초인종을 2시 땡 하면 누를 수 있도록 시험 삼아 한번 오르내려 본다.
플랫화이트를 한잔 시켜 한 모금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 소개하고 싶은 내용, 물어보고 싶은 내용을 적고, 고치고 외워봤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시간이다. 눈을 감은 채 명상을 시도한다. 실패한다. 심장이 존나 뛰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천장이 높고 큰 화분이 많은 디자인 사무실의 모습이 펼쳐진다. 잡지에 나올 법한 멋진 공간이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재채기가 나왔다. 이게 뭐지?
"춥다물, 와줘서 고마워! 오는 데 어렵진 않았니?"
"안녕 크리스, 아니야 쉽게 찾을 수 있었어. 멋진 건물이다"
인사를 마친 후 크리스가 회의실로 안내한다.
커다란 오픈 플랜의 안쪽의 유리로 칸막이가 쳐진 회의실에 들어서니 오히려 회사내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직원들은 대부분 크리스보다 어려 보였다. 나보다 다들 어리다는 얘기다. 어 근데, 저 털뭉치는 뭐지?
"너 개 좋아하니? 저 친구는 우리 전설의 직원, 월터야. 정말 멋지고 대단해."
"개! 개가 있구나!! 개 너무 사랑하지."
나는 부모님 댁의 멍뭉이를 생각했다. 부모님 댁에 가면 가방만 던져놓고 산책시키러 먼저 나가는, 그래서 내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 작고 따뜻한 것. 너무 사랑해서, 영국에 이사오기 전에 아주 긴 산책을 하면서 내가 왜 멀리 가게 됐는지(너도 만난 적 있잖아? 그 곰이라는 친구), 이제 집에 자주 못 오는지(영국이란 데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는데 그게 만만찮게 비싸다) 한참을 설명해 줬지만 들은 채 만 채 꼬리를 뱅뱅 돌리며 저만치 앞서 뛰어가던 털뭉치. 얼굴이 없어지도록 쓰다듬으면 배를 내밀어 까는. 그 귀엽고 재미난 친구. 엄마가 야야, 개 그만 좀 만져라 아주 콧물눈물 난리부르스네 할 때 그 친구. 그렇다 나는 심한 개털 알러지가 있다.
벌렁대던 심장이 짜게 식었다. 그러니 프로젝트 설명도 술술 나오고, 내가 어떤 디자인 철학을 가졌는지, 왜 학교를 설계하고 싶은지 담담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링컨스미스 할 때 스미스 씨도 함께 있었는데 둘은 근엄하게 내 얘기를 길게 들었다. 서로 질문도 적잖게 했다. 우리는 그렇게 1시간 30분에 걸쳐 긴 면접을 이어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무척 심란했다. 아까 그 영어문장은 완벽하지 않았어 하는 당연한 아쉬움도 있었고, 내가 개털알러지를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특이점도 있었다. 그렇데 왠지 월터 때문에 안될 것 같아. 하는 말은 못 하게 될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마주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한다. 부모님 집에 있는 멍뭉이는 내가 그때 한말을 이해하기는 한 걸까.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고 에라 모르겠다.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크리스한테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안녕 춥다물, 오늘 사무실에 와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대화 정말 즐거웠어. 네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최근 상세도면들도 보고 싶어. 이번 주 내로 예시로 보내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 이번 주에 몇 개의 다른 인터뷰가 진행될 예정이야. 그러나 인터뷰가 모두 끝나면 확실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개가 있으면 당연히 만지겠지, 만지지 않고서는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겠지, 그럼 하루종일 재채기, 콧물, 충혈된 눈으로 주변사람들의 걱정을 사겠지, 걱정도 점차 사그라들겠지, 그러나 내 알러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약을 먹어도 소용없겠지. 나는 알러지를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가 추가로 요청한 상세도면을 보내지 않았다. 근데 그다음 주에 크리스가 보낸 이메일은 정말 뜻밖이었다.
-당분간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