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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춥다물 May 08. 2024

첫 번째 오퍼

연봉, 연차 그리고 거절

안녕 춥다물 지난날 너의 포트폴리오에 대해 얘기 나눠서 정말 좋았어. 우리는 이제 모든 지원자들의 면접을 끝냈고 기쁘게 너에게 Part2 Architectural assistant 역할을 제안하고자 해. 우리는 내부 연봉체계를 가지고 있고 RIBA에 따라 Part2 Architectural assistant 기준 연봉은 32000파운드이지만 너에게는 특별히 그 보다 상위하는 연봉을 제안하고 싶어.

주요 직원 복지는 다음과 같아.
-연차 20일 + 뱅크 홀리데이(9일) + 크리스마스부터 연말까지 휴일(5일) + 생일 연차(1)
-건강, 치과 보험
-10% 회사 이익 분배
-자전거 출퇴근 제도, 샤워 제공


우리는 정해진 근무시간을 철저히 지켜. 이 또한 우리 회사의 복지라고 봐도 무방해. 건축 회사에서 이게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알겠지만,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도 돼. 그리고 필요하다면 외국에서 일 년에 몇 주 내로 재택근무도 가능해. 네가 위의 조건에 만족한다면 너의 의사를 공유해 주길 바랄게. 그렇다면 네가 검토할 수 있도록 계약서를 보낼 거야. 위의 어떤 항목이든 더 이야기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메일이나 전화로 연락해 주길 바라.  


연봉

 추가로 보내달라고 했던 도면도 보내지 않았는데 취업 제안이 들어왔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럽고 기쁘고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들이 제시한 연봉을 보고 나는 콧웃음이 나왔다. 금액이 내 연차에 비해 굉장히 작게 책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7년 전이었으면 정말 기쁘게 생각했을, 내 경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금액이었다. 금액 자체는 적은 금액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내가 오랫동안 일을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면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금액을 떠나, 그게 해당 산업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금액이라면 그 일에 가담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을 힘든 방식으로 배웠고, 나는 그러지 않으리리라 다짐했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개털 알레르기 때문에 가지 못한다고 어떻게 전달할까 하던 마음의 짐도 홀가분하게 덜 수 있었다. 곰이 퇴근하자마자 이메일을 받았다고 얘기하니 반색하며 잘됐다. 연봉은?이라고 물어왔다. 내가 말한 숫자 뒤에 따라온 곰의 '뻑킹 헬'이 나를 응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연차

 영국엔 뱅크 홀리데이라는 연휴가 있다. 영국의 은행은 영국을 넘어, 유럽,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중요한 자본주의의 신전 같은 곳이다. 이 은행이 주중 문을 닫는 일이 일 년에 10번 있는데 이것을 뱅크홀리데이라고 부른다. 은행이 문을 닫으면 영국 전체가 멈춘다. 그래서 개인 연차 20일(20일~28일)+ 뱅크 홀리데이 10일 총 30일이 기본 연차가 되는 샘이다. 여기에 크리스마스를 일 년 중 가장 큰 휴일로 생각하는 기독교적 문화에 따라 연말 한 주를 쉬는 회사들이 꽤 있다. 그러나 생일 연차를 공식적으로 내세운 회사는 여기가 처음이었다.   


보험

 영국은 의료보험이 100% 국가에 의해 보장되기 때문에 병원비가 공짜다. 하지만 영국의 병원은 우리나라의 보건소 정도의 환경인 경우가 많고, 느리고, 느리고, 느리다. 특히 위독한 병일 경우 시술, 수술예약을 잡으면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그전에 다 낫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개인병원을 찾아가는데 이런 곳은 진찰료만 30~40만 원으로 굉장히 비싸다. 그래서 종종 회사에서 이런 개인병원을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추가로 사설 의료보험을 지원해주기도 한다. 다만, 치과는 영국에서 원래 비보험이기 때문에 비싸고, 회사에서 치과보험을 제공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다시 연봉

 영국의 건축사체계는 한국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한국의 건축사 자격시험은 4,5년제의 건축학과를 졸업한 자가 3-4년 이상의 실무경험을 쌓고 나서야 종이에 연필과 펜으로 도면을 작도해서 제출하는 옛날 방식의, 건축사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반면에, 영국의 건축사시험은 2년 학사과정을 수료하고(part1), 1년 인턴, 3년 석사(part2) 후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1년간 건축사 되기 위한 실무와 대학 병행 과정을 '수료'하면 최종 면접과 심사를 거쳐 건축가(part3)가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시스템인 두 나라가 같은 점은 모든 건축 디자이너가 자격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인데, 이는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창업하거나(한국에서는 자격증이 없으면 '건축사사무소'라는 이름을 쓸 수 없음) 건축도면에 최고 검수자로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면 자격증이 필수인 직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의 승효상 건축가도, 영국의 토마스 헤더윅도 건축사 자격증이 없는, 사실은 '건축 디자이너'이다) 나는 영국의 체계로 봤을 때 자격증이 없는 part2이지만, 내 경력은 12년 차였다. 물론 내 경력은 한국 10년, 영국 2년으로, 영국경력으로는 신입에 가까웠지만 글로벌한 프로젝트의 경험과, 다른 문화권에서 온 시각의 차이를 많은 디자인 회사에서 바란다며, 내 장점으로 높게 사면서도, 영국의 경력만 인정하겠다고 하는, 그 모순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고, 나는 그 회사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이 얘기를 다른 건축가 친구한테 털어놨다. 작은 회사라 금액이 적긴 하다며 안타까워했지만 뜻밖의 피드백이 있었다.

 너는 개털 알러지가 있다고 회사에 얘기했어야 했어. 알러지가 있다는 이유로 직원을 고용하지 않을 수는 없거든. 회사에서 미리 개가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경우에는 회사에서 너에게 건강, 안전상의 이유로 재택근무나 다른 업무방식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 그건 네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곰은 크리스 메일의 마지막 문장처럼, 네가 그 제안에 관심이 없으면 굳이 거절의 답장을 보내지는 않는 것이 영국 문화이니,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크리스에서 시간 내줘서 정말 고마웠지만 나는 링컨스미스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겠다는 이메일을 굳이 보냈다. 그가 이번 주말, 창업 후 1년간 미뤄 온 신혼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원을 구해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2주간 떠나겠다고 연이은 면접이지만 자신만만하게 몰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계획이 지금 크게 잘못 됐고, 두 번째로 맘에 드는 사람까지 놓치기 전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서 그 두 번째한테 이메일을 보내라고(이렇게 말하진 않았지) 알려주는 것이 친구의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에서였다.

 크리스는 내 거절의 메일에, 즉각 답장해 줘서 고맙다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답장을 1초 만에 보냈다. 나는 다른 더 좋은 제안이 왔다는 뻥을 쳤고 크리스는 더 이상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아 그때 그 크리스네 회사에서 그냥 일한다고 할 걸이라는 전제가 잘못된 헛소리를, 두 번째 면접을 기다리는 다음 6개월 동안, 곰한테 계속했다.  


 -당분간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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