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와 첫 수업이 있던 날. 가을이는 보호자와 떨어져 치료실에 들어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음악치료는 음악이라는 강점으로 보호자와의 분리가 어려운 경우에도 쉽게 치료실에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치료실 문을 열면 아이들이 혹할만한 알록달록한 악기들과, 커다란 드럼, 기타, 우쿨렐레 등 다양한 악기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가을이는 달랐다. 조심성이 많고, 보호자와의 분리가 어려우며, 자기표현이 제한적이라고 인계받은 가을이는 인계받은 그대로 보호자와 떨어져 치료실에 입실하는 것을 참 어려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잘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사방이 막힌 방에 단 둘이 있어야 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지. 그래도 이렇게까지 어려워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내가 너무 어두운 색옷을 입었나?’, ‘내가 무섭게 생겼나?’ 등 별별 생각을 다 해본 것 같다. 나를 만나기 이전에도 다른 치료사들과 그랬던 것처럼 가을이는 치료실 문 앞에서 보호자와 꽤 긴 시간 포옹한 후 치료실 입실했다. 보호자도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이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시고 치료실로 들여보내셨다. 그렇게 보호자와 분리되어 치료실 문을 닫자, 의자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는 가을이. “선생님이 새로운 인사노래를 가져왔는데, 한번 들어볼래?”라고 묻자, 매우 큰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던 가을이의 힘찬 대답을 들으니, ‘왠지 재밌게 수업할 수 있겠는데?’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첫 수업이 시작되자, 가을이는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일정 거리를 두고 내 질문에 답하기를 반복하며 나를 보는 척, 안 보는 척하기 바빴다. 아마도 내가 누군지 파악하기 위함이겠지. 가을이는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들과 다양한 악기들을 내게 소개하느라 바빴다. “선생님. 이 노래 알아요?”라고 하며 ‘작은 별’을 피아노로 연주해주기도 하고, 유치원에서 배운 우쿨렐레를 연주해주기도 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였지만 말이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가을이의 모습을 보며 커져간 기대감이 다음 시간에도 이어질 거라는 것이 착각이라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일주일 후, 가을이와의 두 번째 시간엔 이상하게 지난 회기보다 치료실 입실을 더 어려워했다. 일부로 밝은 옷도 입고, 목소리톤도 더 높여보려고 했는데 실패였다. 일주일 만에 만난다는 것이 문제였을까? 역시 치료실 입실까지의 시간이 꽤 많이 필요했다. 보호자와 끌어안고, 뽀뽀하고, 또 끌어안기를 반복한 가을이는 치료실에 입실한 후에도 한참 동안 문 앞에 서있었다. 지난 회기에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하길래, 나와 꽤나 친해졌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라는 사실이 분명 해지는 순간이었다. 가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중심으로 노래 가사를 마음껏 바꾸며 가을이가 자기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노래 가사가 가을이의 마음대로 바뀌어가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그래도 점점 웃음이 많아지는 가을이를 보니 내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을이와 다양한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다. 노래 가사를 만들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악기를 펼쳐놓고 가을이가 연주하고 싶은 연주 순서를 정해보도록 하며 가을이의 적극적인 자기표현을 유도하기도 했다. 가을이는 내가 가을이의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함께 악기 연주를 하기 위해 더 좋은 방법을 고민하려는 모습이었다. 치료실에 들어오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심지어 이젠 치료실에 올 때 나와 함께 할 활동을 집에서 직접 챙겨 오기도 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 때로는 보드게임, 때로는 함께 부르고 싶은 노래, 때로는 악기를 챙겨 오며 함께 할 활동을 기대하는 가을이의 모습은 가을이가 자기표현에 좀 더 적극적일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 가을이의 개인 사정으로 종결하게 되던 어느 날. 가을이는 이제 치료실에 들어가기까지 보호자와 길게 보내던 이별의 시간 따위 필요 없는 아이가 되었다. 치료실에 나보다 먼저 뛰어들어가는 가을이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젠 치료실에 뛰어 들어갈 만큼 성장했구나. 잘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