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버니스(Inverness)
나와 짝꿍이 스카이섬에서 나와 향한 곳은 인버니스라는 곳이다. 하이랜드에서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기도 한 이곳에서 우리는 하룻밤을 머물렀다. 하이랜드에서 가장 크고,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가 바로 인버니스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기억을 더듬어 그 시간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인버니스에서의 1박2일 이야기, 이제 시작한다.
"숙소에 먼저 가서 짐을 풀자. 그리고 시내로 나가서 구경하고, 저녁도 먹고 돌아오자."
오전에 스카이섬을 빠져나와 약 3시간 남짓 달려 인버니스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부터 푼 우리는 잠시 쉬었다가 인버니스 시내로 향했다. 숙소가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외곽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갈 생각으로 체크인을 하면서 숙소 주인에게 시내로 가는 버스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나 숙소 주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우리는 몇 번 버스를 타고 몇 분정도 가야 하는지를 기대했는데, 주인은 버스를 타지 말라고 했다. 숙소까지 오는 길에 길에 다니는 버스를 이미 봤기에 버스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타지 말라고 한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물었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아. 시간을 안 지킬 때도 있고, 아예 안 올 때도 있어. 버스 타고 가면 택시 타고 돌아올 생각하고 가."
이 대답을 듣고 우리는 잠시 당황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정보가 우리 뇌로 들어오면 그 정보를 처리하는데 일정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는 지금 그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숙소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도 방으로 돌아와서 대안을 생각했다. 대안이라고 해봤자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것이었으니, 시내에 있는 주차장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시내에 주차장은 꽤 많았고, 가격도 나름 합리적이었다. 아주 잠시 당황의 시간을 보낸 우리는 차 열쇠를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사실 시내에서 분위기 좋은 펍을 발견하면 맥주도 한잔 하고 싶었는데, 차 열쇠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 그 바람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인버니스 시내까지 가는 길이 편해졌으니, 차를 몰고 가는 것이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거리를 걸어볼까?"
"저 앞에 유명한 책방 하나 있다. 거기 잠깐 들어가 보자."
우리는 인버니스 버스터미널 옆에 차를 대고, 시내로 걸어들어갔다. 시내 중심가까지 약 5분 남짓 걸으면 될 정도로 주차장의 위치는 정말 좋았다. 시내로 걸어가는 중에 짝꿍이 핸드폰을 보더니 앞에 꽤 유명한 책방이 있다고 했다. 책방 드나드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는 이곳을 당연히 들렀다 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가 들어간 책방은 리키의 책방(Leakey's Bookshop)라는 곳으로 구글맵에 2,000명이 넘는 리뷰가 달려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책방으로 들어서면 2층으로 된 구조가 나타나고, 이내 책들에 둘러쌓인다. 2층짜리 내부의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장에 빼곡하게 들어선 책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책방에 있는 책들은 중고책으로, 꽃혀 있는 책들을 꺼내서 살펴보면 이전 독자들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이 책방의 분위기와 감성이 맘에 든 우리는 1층과 2층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왔다.
서점을 나온 우리는 인버니스의 중심가를 따라 걸었다. 영국 특유의 고풍스런 건물이 줄지어 이어진 거리는 비교적 한적했다. 하이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잉글랜드의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하면 규모가 작은 편이어서 시내에도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조금 더 걷다보니 인버니스 기차역에 다다랐고, 역 앞에는 큰 광장이 있었다. 광장 주변으로는 쇼핑센터가, 그리고 그 앞에는 높게 솟은 기념탑이 있었다. 그 기념탑 꼭대기에는 유니콘이 역동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유니콘이 설치된 기념탑은 처음 보는 것이라서 다소 신기했다. 기념탑을 왜 세웠고, 유니콘이 왜 만들어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독특한 조형물이었다.
중심가를 걸으며 인버니스 시내를 구경하던 우리는 분위기 좋은 펍으로 들어갔다. 스코틀랜드 분위기가 물씬 나는 펍이었는데, 이곳에서 나와 짝꿍은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하이랜드 여행의 마지막이니 만큼, 스코틀랜드의 전통 음식인 하기스(Haggis)를 먹어보기로 했다. 영국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하기스를 먹어볼 기회가 딱히 없었는데, 마침 스코틀랜드를 여행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기스는 양의 부속물을 귀리, 양파 등과 함께 섞은 후에 쪄난 음식이다. 우리나라의 순대와 거의 비슷한데 고기 종류만 양이라는 차이가 있다. 하기스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음식이라 주문하면서도 살짝 걱정했는데, 한국의 순대에 익숙해진 나의 입맛을 믿으면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 사진과 같은 모습의 음식이 나왔다. 첫 인상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물었는데, 소스가 있어서인지 고기 냄새도 없이 정말 맛있었다. 고기 냄새에 민감한 짝꿍이 한입 먹어보더니 나쁘지 않다고 얘기했으니 확실히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물론 식당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 펍에서 먹은 하기스만큼은 합격이었다. 하기스에 대한 첫 번째 경험을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에도 스코틀랜드에 간다면 다른 음식점에서 다른 스타일의 하기스를 먹어보고 싶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뒤에서 악기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무대 위에서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펍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오늘이 이 펍에서 라이브 공연이 있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 무슨 행운일까, 우리는 음식을 천천히 먹으면서 그들의 공연을 기다렸다. 그리고 공연이 시작할 때쯤 펍의 자리는 꽉 들어찼고, 맥주를 주문하는 바에는 맥주 한잔을 손에 들고 공연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금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일찍 온 우리는 운이 좋게도 정말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운전해야 돼서 술을 마시지는 못했지만, 라이브 음악이 연주되는 펍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하이랜드 여행 마지막 날, 하이랜드로부터 아주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라이브 음악을 한참 즐기던 우리는 펍을 나와 숙소로 돌아갔다.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한 후, 다시 인버니스 시내로 향했다. 이날 에딘버러까지 먼 길을 가야했지만 이대로 인버니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반나절이라도 인버니스를 조금 더 걷고,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날 주차했던 곳에 그대로 차를 댄 후 다시 시내 중심가를 거닐었다. 어제 갔던 길을 다시 가보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렇게 시내를 걷던 우리는 어느새 인버니스를 가로지르는 강변에 다다랐고, 이때부터는 이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강은 네스강(River Ness)으로 하이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인 네스호(Loch Ness)에서 흘러나와 인버니스를 남북으로 가로지른 후, 북쪽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어느 도시든 강 주변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우리는 강 옆을 따라 걸으면서 인버니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인버니스의 주요 명소인 인버니스 성은 열심히 공사 중이었고(이 때문에 인버니스 성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 반대편에는 인버니스의 정신적 지주인 인버니스 대성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강가에는 우리처럼 산책하는 사람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친구들끼리 재잘되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우리는 네스강 주변의 모습을 감상하고 관찰하며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작은 다리에 도착했고, 우리는 더 앞으로 가지 않고 이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날 에딘버러로 돌아가야 했기에 이곳에서 한정 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다리를 건너자 잘 꾸며진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기념탑도 있고, 잘 다듬어진 꽃들도 있었고, 푸른 잔디밭도 있었다. 공원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작은 이 공간은 일반 도로 옆에 무심한 듯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장소일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전쟁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다. 이 공간은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여러 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원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매우 차분했고, 우리는 마음 속으로 잠시나마 묵념을 올리고 공원을 나왔다. 그리고 우리가 온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네스강 옆을 걸어갔다. 가까이에서 봤던 인버니스대성당의 모습을 강 반대편에서 바라보기도 하고, 이와 반대로 멀리서 봤던 인버니스성의 바로 아래를 지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인버니스에서 보낸 시간은 조금씩 끝나가고 있었다. 주차장으로 가까워지는 만큼, 인버니스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주차장에 도착했고, 곧 인버니스를 벗어났다.
이날 우리는 인버니스에서 에딘버러 공항까지 약 3시간을 운전했다. 이날 비행기를 타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날 비행 시간이 비교적 빨랐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서 하루 머물고 스코틀랜드를 떠나는 일정이었다. 우리는 인버니스에 대한 기대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다. 자연 경관을 보기 위해 떠났던 하이랜드 여행이었기에 도시에 대한 관심은 비교적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인버니스는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좋았다. 딱히 눈에 확 띄고, 우리의 오감을 사로잡은 강렬한 자극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포근하고 아늑한 도시의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짝꿍은 먼 미래에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인버니스에 정착하는 것도 고민해 보자고 할 정도였고, 나도 어느 정도는 짝꿍의 말에 동의했다. 짧은 시간 머물다 간 것이었지만, 그만큼 인버니스는 살기 좋아 보이는 동네였다. 물론 짝꿍이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하니까, 짝꿍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겨울에 인버니스 다시 가봐. 그 마음이 유효할지."
그렇다. 인버니스는 영국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이다. 영국의 겨울 날씨는 어딜가나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씨의 혹독함은 더욱 배가된다. 즉, 인버니스의 겨울은 매우 혹독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저러나, 인버니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인상은 매우 좋았고, 다시 하이랜드를 여행하게 된다면 인버니스에서 또 머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