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옛적에. . .
남극 대륙 근처에서 얼음 한 조각이 바다를 떠돌고 있었다. 투명한 그 얼음의 바닷물에 잠긴 부분에는 한 여인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리따워 바다 속 온갖 물고기들이 몰려들어 감탄 어린 말을 주고받았다.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얼굴의 양 볼에는 살짝 붉은 기가 감돌고 있었으며, 화려하면서도 기다란 은발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어쩜 저리 고울까…….
저 모습 저대로 천년만년, 아니 영원히 남아 있으면…….
물고기들은 그 여인 주위를 떠돌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의 모습에 물고기들도 부끄러워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고 외면하다시피 하면서도 살짝살짝 눈길을 돌려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옛날 옛날 한 옛날, 남극 바다에 엄청난 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굵은 눈발이 이리저리 휘날리며 강한 바람이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불어 내려와 바닷물을 요동하는 바람에 시퍼런 물이 하늘 한복판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리꽂히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바다 속 생물들은 혼비백산하여 우왕좌왕 큰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이미 많은 물고기들이 강한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삶의 터전을 잃고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그때 바닷속 아주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잠꾸러기 대왕이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지러운 물속의 광경을 보고 급히 올라와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다동굴의 신인 돈이세포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돈이세포는 원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그림자였으나, 어느 날 거울 속으로 들어가 이름도 거꾸로, 얼굴도 위아래가 거꾸로 된 채 바다 속 저 아래 깊고 깊은 동굴에 숨어 살던 은둔자였다.
돈이세포는 잠꾸러기 대왕이 너무도 간절하게 호소하는 바람에 수억 년 만에 동굴에서 나와 바다의 상태를 살폈다. 그랬더니 전에는 평온과 평화 그 자체였던 바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돈이세포는 동굴 깊숙이에 보관되어 있었던 평온의 창을 꺼내들고 어마어마한 폭풍으로 혼란에 휩싸인 위쪽 바다로 급히 올라갔다. 그리고는 누가 바다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사방으로 알아보았더니, 아 글쎄 짝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문드러져 녹아내린 바다지네의 왕 징글러리 마왕이 저지른 횡포였던 것이다. 그럼 대체 누구를 짝사랑했기에 그토록 격렬한 소동을 부렸던 것일까?
알고 보니 바다지네의 왕은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를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짝사랑하다가 최근에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했으나 그만 퇴짜를 맞았더랬단 말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분노로 바다지네의 왕 징글러리 마왕은 온 세상을 뒤집어 놓기로 하고 발광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 비밀음모를 꾸미는 악당이 있었다. 바로 더러비 가문의 쌍둥이 형제였는데 형의 이름은 아유, 동생은 넘이었다.
그러나 이 두 형제는 머리는 떨어져 있지만 몸은 붙어 있는 괴물 같은 형체여서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이 형제도 역시 남몰래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만일 그녀와 결혼하면 누가 차지해야 할지 늘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다지네의 왕 징글러리 마왕이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에게 퇴짜 맞고 심술을 부린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들 나름대로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즉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를 몰래 납치해서 멀고 먼 바다로 도망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일단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를 빼돌린 뒤 둘 중에서 누가 차지할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자고 합의를 한 상태였다.
그래서 더러비 형제는 바다의 마녀에게 찾아가서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해서 아주아주 맑고 맑은 얼음 한 조각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는 크기의 얼음을. 그리고 재빨리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에게 몰래 다가가서 납치한 뒤 그 얼음에 가둬버리고 말았다. 그런 뒤 더러비 형제는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멀고 먼 바다로 도망가 버렸다.
이때 돈이세포가 그 소식을 듣고 무서운 속도로 뒤쫓아갔다. 그 바람에 바다는 더욱 큰 파도로 출렁였으며, 온 세상은 마치 태초 이전처럼 큰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돈이세포는 간신히 더러비 형제를 따라붙을 수 있었다. 더러비 형제가 도망치면서도 누가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를 차지할지 다투느라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돈이세포가 더러비 형제를 거의 붙잡을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갔을 때 두 형제는 자신들이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자신들이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를 차지할 수 없을 바에야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가 들어 있는 얼음을 깊고 깊은 바다 속 동굴에 감춰놓기로.
그렇게 해서 더러비 형제는 바다 저 아래 깊숙이 아주아주 음침한 동굴에 들어가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의 얼음을 꼭꼭 숨겨놓고 줄행랑쳐서 저 멀고 먼 우주 구석으로 도망가 버렸다.
그 바람에 돈이세포는 바다의요정들의여신의외사촌의여동생의친구인뱌댜도 찾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와중에 폭풍이 가라앉고 바다도 다시 잔잔해져서 바다 속은 평온한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돈이세포나 바다지네의 왕 징글러리 마왕을 비롯해서 모든 바다의 신들은 시들해져서 각자 예전처럼 돌아가 잠꾸러기 대왕은 바다 깊은 곳으로 돌아가고, 바다동굴의 신 돈이세포 역시 자신이 살던 깊은 동굴에 들어가 잠에 곯아떨어졌으며, 바다지네의 왕 징글러리 마왕 역시 자기 고향인 바다구더기의 무덤, 즉 매우지저분해서리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해서 몇 십억 년이 흐른 뒤 어느 날 바다 속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엄청난 해일이 발생하고 바다 속이 와장창 뒤집힌 뒤, 남아메리카 대륙 끝의 어느 작은 섬 근처에 자그마한 얼음덩이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얼음 속에는 천상에서나 볼 듯한 어여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러던 중 그 근처를 지나가던 한 어선이 이 얼음을 발견하고 건져 올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얼음 속에 너무나도 어여쁜 여인이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어부들은 자기들이 사는 섬으로 돌아가서 그 얼음을 조심조심 내린 뒤 나이 많은 지혜자에게 가지고 갔다.
그러자 지혜자는 그 얼음을 보고서 섬에 있는 가장 깊은 동굴 속에 갖다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에 다시 꺼내와 작은 나룻배에 실어서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위에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지혜자의 말대로 보름달 밤 그 얼음을 바다에 내려놓자 얼음이 깨지며 그때까지 잠자고 있던 여인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여인은 얼음에 걸터앉아 자신이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 길고 긴 머리칼로 온 몸을 감싼 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너무나도 신비로워 마주 바라보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때 지혜자가 앞으로 나서며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서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여인은 그 지팡이 끝을 붙잡고 얼음에서 내려와 바닷물로 들어가서 해변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뒤 여인은 천천히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쫓아가려 하자 지혜자가 나와서 가로막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여인은 섬 꼭대기로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었다. 숲을 헤치고, 바위 절벽 옆으로 난 거친 길을 따라서 거침없이 천천히, 천천히……. 삐죽삐죽한 돌멩이와 가시덤불이 가득한 곳을 지나면서도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고, 독사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숲을 지나갈 때도 아무런 벌레나 짐승이나 덤벼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맑디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산꼭대기를 뒤덮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둥번개가 치며 요란한 굉음과 함께 하늘과 산과 땅이 몹시 흔들렸다. 그러는 중에도 여인은 쉬지 않고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자 두 팔을 내밀어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소용돌이 같은 것이 내려와 여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런 뒤 소용돌이와 함께 여인은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갑자기 하늘이 다시 맑아지며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사방이 고요해졌다.
산 아래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뒤 하늘이 다시 평온해지자 지혜자가 나서며 산으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니…….
그곳에는 한 여인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모습은 아까 본 그 여인과 똑같았다. 너무도 아름답고 평온한 모습의 석상.
이때부터 그 섬 주위에서는 수많은 물고기가 모여 들어와서 섬사람들은 바다 멀리 나가지 않고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었고, 태풍이나 거친 파도가 칠 때는 그 석상이 빛을 내어 어부들이나 그 주변을 지나가는 배에게 물길을 안내해 주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그리고 1년에 한번씩, 그 여인이 도착했던 그 날짜에는 그 석상 주위에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어디에서 왔는지 수많은 나비들이 몰려와 섬 꼭대기에서 환상적인 모습을 펼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지구뿐만 아니라 저 먼 우주의 별에서까지 멋진 기사와 용사와 부자와 왕자들이 그 섬으로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석상이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섬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수천 년이 지난 어느 날, 지독한 안개와 자동차나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주변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폭풍에 휩싸인 어느 음침한 도시의 뒷골목에서 여기저기 해진 낡은 외투를 입고 다 닳고 구멍까지 숭숭 뚫려서 발가락이 나온 낡은 신발을 신은 한 소녀가 몹시 지친 모습으로 아주아주 지저분한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지와 부랑자와 창녀들이 우글거리는 진흙탕 길을 따라서.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느릿느릿 지친 몸을 간신히 이끌듯 걸어가고 있었는데, 소녀가 발걸음을 뗄 때마다 그 자리에서는 사르르 하며 금색, 은색, 장미색, 연보라색 빛들이 피어오르다 금세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뒤로는 각종 벌레들이 꿈틀꿈틀거리며 줄을 지어 따라오고 있었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 벌레들의 움직임에서는 일정한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 벌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음표 같은 것이 떠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음표들이 살랑살랑 춤추듯 천천히 하늘로 솟아오르며,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너무도 아름다운 음악이 골목 안으로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