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에 살금살금 비가 내린다. 가는 비가. 사알짝 살짝살짝 하늘을 적시고, 들판을 적시고, 강과 시내와 나무와 풀들을 촉촉이 적신다. 풀잎에서는 은빛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물기에 젖은 땅 위로는 지렁이가 꿈틀꿈틀 기어나오고, 옅은 구름이 낀 하늘은 물에 젖은 이불보나 활짝 펼쳐놓은 와이셔츠처럼 넓게 퍼져 있다.
널따란 하늘 가장자리로 옅은 푸른 빛이 비치는 것을 보니 큰 비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바싹 마른 땅들에게 숨쉴 틈을 주고는 그치려는 모양이다.
보스리
보슬보슬
야드리 야들야들
살며이
내려내려
촉촉이 적셔적셔
메마른
들녘천지에
생기명기 돋도다
아침 이슬처럼 맑고 영롱한 물방울이 조롱조롱 풀잎마다 맺혀 있고, 그 위로 또 다른 물방울이 떨어지며 잎들이 파르르 흔들리자 앙증한 은빛 구슬들이 또르르 굴러내린다. 그리고 그 위로 위로 또 다른 물방울들이 앞다투어 내려앉으며 잎사귀마다 소란스란 야단이다.
그러던 어느 잎사귀 하나에 물방울처럼 작고 앙증한 풍뎅이 한 마리가 우산도 없이 내려앉아 살금살금 기어간다. 등짝에 물방울 무늬 비옷이라도 걸친 듯 포륵포륵 떨어지는 물방울을 거침없이 맞으며 좁은 잎사귀 위를 배회하는 것이다. 갈 곳도 없으면서 그저 비 오는 낭만의 오후를 즐기려는 듯이.
그러다가 좀 지루해졌나, 풍뎅이는 잎 뒤쪽, 그러니까 이파리 아래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쑥 내려가고 만다. 그러더니 마치 중력의 법칙은 아예 무시하려는 듯이 이파리 아래쪽에서도 거미줄이나 접착제도 없이 거침없이 슬금살금 기어다니는 것이다. (비 오는 날에 장화도 신지 않고스리 . . )
풀잎 하나 위에 펼쳐진 세상, 상상해 보셨는지? 실은 나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심드렁하게 사는 세상, 그렇잖아도 무심무념한 삭막한 마음, 뭐 하나 시원한 게 없이 빈둥빈둥한 일상 속에서 어느 날 문득 이파리 한 장이 눈에 띈 것이다. 들판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집 안에 놓인 화분이나 동네 어귀 어느 구석에서라도 아무렇게나 자라 있는, 평소에는 눈가에조차 잡히지 않던 그 잡다한 풀잎들. . .
괜한(?)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 이파리를 뒤집어 보았다. 그러자 와르르 물방울이 난리를 치며 사방으로 튀며 떨어져 내린다.
아차, 실수! 미안, 미안. . .
갑자기 식물들에게, 이파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와 동시에 슬며시 돋아오르는 공연한 호기심. 이파리 한 장에 얼마만 한 생명이 담겨 있을까. . . ?
풀잎, 이파리, 잎사귀, 초엽(草葉), 픐닙. . . 영어로 하면 a blade of grass, a grass leaf, a leaf of grass. . .
픐닙 한 장이라도 허공에 떠돌다
바람이 날리우면 마음이 서럽나니
차라리 땅 우에 내려앉아 뒹굴어
저 갈 데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하여나 이 또한 공연히 어설퍼
빈 가슴만 허허롭기 그지없구나. . .
어느 선사의 좁다란 마당 한 켠에 버려진 못생긴 돌판에 누군가가 낙서하듯 써놓았다는 희미한 글귀. 현대어로 풀어써서 대강 그 뜻이라도 짐작하지만, 원문은 옛 언문에다가 그나마 알아볼 수 없는 고어체란다. 그리하여 나름 대강 위와 같이 해석(?)해서 풀어 보았다.
풀잎 한 장. 왜 하필 풀잎 한 장일까? 봄가을 할 것 없이 바깥에만 나가면 지천에 깔린 것이 나뭇잎이요 풀잎인데, 그 중 한 장에 왜 옛 사람은 마음을 두었을까? 혹 그니는 과학하는 마음이 깊어서 이파리 한 장에 어떤 우주의 비밀이, 삼라만상의 본질이 들어 있을까 하고 고찰하며 고뇌하는 심성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그 옛 사람의 마음을 슬그머니 도둑질해 와서 이파리 한 장을 내 눈 앞에 두고 시심이 아니라 어설피 과학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풀잎(Leaves of Grass)》이라는 시집이 있다. 미국의 국민시인 월트 휘트먼(1819~92)의 주옥 같은 시들이 실려 있다. 특이한 점은 그당시까지만 해도 영시에서 중요시 여기던 각운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한 편만 제외하고) 자유시와 비슷한 형태로 시작(詩作)을 했다. 1855년에 발행된 이 시집에는 암살당한 에이브러햄 링컨을 추모하는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가 실려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휘트먼은 특이하게도 풀잎 사랑이 끔찍하여 그에 대한 시를 많이 지었으며, 근 40년에 걸쳐 400수가 넘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외설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 있어서 당시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미국 전통 시의 표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차, '이파리의 과학'이라고 소제목을 달아놓고서는 다른 곳으로 흐르고 말았다. 종종 정신 줄 놓고 사는 바람에 이러한 짓(?)을 벌이게 된다.(꾸벅)
풀잎 한 장. 그 뒤를 슬쩍 들여다본다.
풀잎 아래쪽은 어떻게 생겼을까? 위쪽과는 어떻게 다를까?
풀잎은 식물의 중요한 영양기관에 속한다. 이곳에서 호흡과 탄소동화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주로 녹색이며, 잎몸과 잎자루 그리고 턱잎으로 이루어져 있다.
잎의 전형적인 구조는 잎몸(葉身), 잎자루 그리고 턱잎으로 되어 있다. 잎은 식물에서는 아주아주 중요한 기관으로, 그곳에서 광합성과 호흡을 담당한다. 광합성은 영양분을 생산하는 것이며, 호흡은 숨 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생명체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식물에서 잎과 꽃, 줄기 그리고 뿌리나 열매 외에 다른 기관이 무엇일까? 사실상 없다. 물론 이들이 눈으로 보기에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는 있겠지만,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식물이 제대로 생존할 수 없다.
잎은 생물시간에 잘 배우셨겠지만, 일반적으로 위에서 소개한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면 갖춘잎, 어느 하나라도 부실하면 안갖춘잎이라고 한다. (생물시간에 잘 배우신 분들은 통과.)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턱잎과 떡잎의 구분이다.
턱잎 | 잎자루 아래에 붙어 있는 작은 잎. 보통 한 쌍으로서, 잎 전체를 떠받치기도 하고 어린 잎이나 눈을 보호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쌍떡잎식물의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여기에서 예외적인 것은 생략한다. 이것을 엽탁(葉托) 또는 '탁엽'이라고도 한다.
떡잎 | 이는 식물이 자랄 때 맨 먼저 나오는 잎을 말한다.
나뭇잎은 가을에 색이 변하게 된다. 가을에 공기가 건조해지면서 나무의 진액이 잎을 통해 발산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이다.
식물의 잎에는 수명이 있다. 물론 '웰위치아 미라빌리스(Welwitschia mirabilis)'처럼 평생 잎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리 길어도 10년을 넘지 못한다. 웰위치아의 경우 수명이 최대 2천 년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잎도 나무와 연륜을 같이하기 때문에 2천 년을 생존(?)한다. 이러한 웰위치아는 아주 독특한 경우여서 일본에서는 '기상천외(奇想天外)'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이 식물은 떡잎을 제외하면 평생 자라나는 본잎 2장이 잎의 전부다.
그리고 보통 외떡잎식물은 나란히맥, 쌍떡잎식물은 그물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듯 세부사항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골치만 아플 뿐 '독서'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에 그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대부분의 쌍떡잎나무가 그물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여기에 더해 쌍떡잎식물에서 잎자루 하나에 잎이 하나가 달려 있는 홑잎과 두 개 이상 달린 겹잎이 있다는 점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한편, 겉보기에는 잎처럼 생겼지만 실제로는 잎이 아닌 것도 있다. 선인장에서 넙적한 잎의 모양을 지닌 것이 실제로는 줄기이며, 역시 잎처럼 생겼지만 이 또한 줄기인 필로클라두스(Phyllocladus)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밖에 아예 잎이 없는 식물도 있다. 기생식물 중에서 여기에 속하는 것도 있는데, 거미란 종류는 잎이 아예 없고 그 대신 뿌리로 광합성을 하며 살아간다.
잎의 앞면(윗면)은 대개 뒷면(아랫면)보다 색이 진하다. 그럼 뒷면도 광합성을 할까? Yes! 잎 윗면에는 울타리조직이란 것이 있고 그곳에 엽록체가 다량 밀집해 있어서 광합성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반면에 뒷면은 해면체로 되어 있지만 엽록체가 설렁설렁 배열해 있어서 이 역시 광합성을 한다. 물론 윗면보다는 덜 활발하지만. 그러나 상수리나무의 경우 이와는 반대여서 아래쪽이 위쪽보다 더 밝은 녹색을 띠고 있다. 굴참나무도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도토리나무의 잎은 앞면이나 뒷면이나 모두 비슷해 보인다.
식물에서 '졸'자가 들어가면 대개는 작다는 뜻.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등은 잎이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이 중에서 졸참나무의 잎은 상대적으로 작다. 이 글의 주제에 맞지 않지만, 여기에서 아주 잠깐 '졸'에 대해 생각해 본다.
卒 | 군사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의미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막일을 하는 하인이나 조무래기 등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
拙 | 졸하다, 죽다, 서툴다, 운이 없다, 소용없다, 쓸모없다
猝 | 갑자기, 급히, 빨리, 창졸지간에
다음으로 (갑자기 그냥) 졸참나무를 등장시키겠다. 그 이름 때문에. 이름에서 '졸'자가 들어가면 대개는 작거나 볼품없다는 뜻. '졸'참나무 역시 잎이 작으며, 굴참나무나 상수리나무처럼 기다랗지도 않고 상대적으로 타원형이다. 잎의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 열매인 도토리는 작으며, 깍정이에 쌓여 있는 부분보다 드러난 부분이 많다. 한편 도토리는 길쭉한 편인데, 이름과는 달리 맛은 가장 좋다고 한다. 게다가 나무도 작지 않다. 졸참나무가 졸하다고 무시할 필요는 없는 듯. 꼴찌 인생이라고 외면하면 안 되듯이.
다들 알다시피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를 '낙엽이 진다'로 표현하는데, 이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괜한 설명을 집어넣었다. 다들 아는 사실을. . . 쩝!) 이는 (이 역시 다들 알겠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 기온도 내려가고 공기도 건조해지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생리적인' 현상이다. (여기에서 '생리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어쩐지 좀 다른 듯 느껴지지 않을지. 과학적으로.)
그렇다면 낙엽의 단계를 지나면 무슨 '엽(葉)'?
맞다. 고엽(枯葉). 여기에서 '고(枯)'는 '마르다, 수척하다'는 뜻이다. 월남전에서 미군이 고엽체를 엄청 사용해서 이 역시 엄청 비난을 받았다. 고엽제가 나무에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유증이 심각해서 월남전에 참전한 미군은 물론 한국군 일부도 그 이후 엄청 고생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식물이면 우리는 무조건(?) 푸른 잎을 생각하지 않을까? 게다가 식물에서 이파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실은 그렇지 않은 종류도 있다. 우선 기생식물. 이들은 일단 잎이 없다. 그러하니 광합성을 할 수 없을 테고, 그러면 당연히 다른 식물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
또한 선인장 종류. 이들은 잎이 없다. 그 대신 두툼한 줄기가 잎 대신 광합성을 한다. 또한 거미란 종류는 줄기는 없이 뿌리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뿌리가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이빨 대신 잇몸이란 말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식물 중에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것들이 꽤 많다.
가새뽕나무 | 가지 끝이 가위로 잘근잘근 잘라놓은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가새는 건물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나무나 쇠를 이르지만, 우리 옛 어른들은 가위를 가새로 부르기도 했다. 일종의 사투리인 셈.
고추나무 | 잎이 고춧잎을 닮아서 그렇다나.
기린초 | 두툼한 잎과 꽃이 마치 기린의 뿔처럼 생겼다고 한다.
두루미꽃 | 잎이 활짝 벌어지면 마치 두루미가 날개를 펼친 모습 같다나. . .
박쥐나무 | 나무의 모양새가 날개를 활짝 편 박쥐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비자(榧子)나무 | 나무줄기의 좌우에 바늘잎이 줄줄이 달려 있는 모습이 한자의 '아닐 비(非)'자를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오갈피나무 | 이파리가 다섯 개로 갈라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 오가피(五加皮)나무라고도 한다. 껍질은 한약재로도 사용한다.
좀깨잎나무 | 앙징스럽게 작은 깻잎 모양의 나무라서 그렇게 불렸다나.
칠엽수(七葉樹) | 잎이 일곱 개로 잘라져서 붙여진 이름.
팔손이나무 | 잎이 8개로 갈라져서 마치 팔손이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붉나무 | 단풍이 유난이 붉게 물들어서. . .
사시나무 |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잎이 화르르 떨어서 붙여진 이름. 잎자루가 유난히 길어서 그렇단다.
은단풍(銀丹楓) | 단풍나무인데, 잎의 뒷면이 은빛으로 되어 있어서. . .
자귀나무 | 밤이 되면 작은 잎들이 서로 닫히는 바람에 잠자는 귀신 같다고 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다고 한다. 영어로는 Silk Tree, 한자로는 夜合樹(야합수). 꽃은 분홍실이 부챗살처럼 퍼져 있는 모습인데, 이 실(thread)은 실은 3cm나 되는 긴 수술이 축 내려온 것이고, 그 끝은 분홍색이어서 한눈에 보아도 핑크빛 연정(?)이 연상된다고 한다. (무딘 사람들은 빼고)
낙엽송(落葉松) | 나뭇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진다.
낙우송(落羽松) | 잎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가지들도 마치 깃털처럼 떨어진다. 북아메리카 원산이며, 침엽수인데도 낙엽이 진다. 키가 아주 크다. 나무 이름에 송(松)자가 들어가 있지만, 소나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아차, 나무라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겠구나.) 어느 자료에서 보면 사람과 고양이만큼 차이가 난다고 한다. 주로 공원이나 호수 주변에 많이 심겨 있으며, 이런 나무 밑에서 자리를 깔고 시집 한 권 들고 앉아 있으면 그대로 그림이 된다. (지금 내가 사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만 동쪽에 있는 베이 에어리어의 한 숲속 호수 가장자리에도 이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