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기 바리스타 수업 피하기
오전 내내 두통에 시달렸다. 요 며칠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루에 한두 잔씩 꼭 마시던 커피를 미루자 금 커 현상이 온 모양이다. (금커는 금단커피증상을 칭하는 내가 만들어 쓰는 말이다.) 금커현상이 싫어 한동안 커피를 끈고 민트티로 갈아타고자 노력한 적이 있다. 하지만 태양 빛 강렬한 계절, 여름이면 항상 떠오르는 아이스라테의 유혹은 참기 어렵다.
곱고 하얀 우유베이스에 찐한 향의 원두 투샷이 내려앉아 생긴 두 개의 층을 휘저으면 은은한 라테 색깔로 변한다. 잘 섞인 라테에 빨대를 깊게 꽂아 쭈욱 마시는 첫 모금은 청량한 어른의 맛이다. 빨대로 들어온 카페인은 즉각 심장과 두뇌를 두드리며 탁한 공기를 환기시키고 정신을 일깨운다.
이봐! It’s play time 눈떠!
대단한 의지와 용기가 없다면 커피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헤어지고 싶은데 이미 그에게 스며들어 일상이 되어버려 재회를 반복하는 오래된 연인처럼 삶에 들어와 버렸다.
거리에는 한 집 건너 한 집에 카페가 들어차 있다. 특히 노란색 간판을 내세운 저가 커피숍의 유혹은 떨쳐내기 어렵다. 길을 가다 목마를 때 편의점에서 생수 한 병을 살 때는 고민하지만 노란 간판커피숍에서 1500원짜리 메가사이즈 커피를 살 때는 고민하지 않는다. 물은 집에서 마시면 되지만 아이스커피를 사면 수고롭게 얼려야 하는 얼음과 커피를 동시에 마실 수 있고 컵사이즈도 크니 완전 이익이라고 생각하며 합리화시켜 버린다.
한 때는 우유가 싫어 아메리카노만 마셨다. 삶도 무겁고 나의 무게도 무겁고 좀 더 가벼워지고 싶었다. 왠지 씁쓸한 커피를 마시면 지금의 씁쓸한 상황이 조금은 덜 쓰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쓴 술을 마시며 취해 고통을 잊으려는 듯 커피를 해방구로 삼았다. 이제는 마음이 누그러진 것일까? 다시 라테로 돌아왔다.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처럼 그전보다 더 진하게 애틋하게 매일 만나고 있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언젠가는 커피집 사장이 되고 싶었다. 크지 않은 아담한 카페에 직접 구운 마들렌과 쿠키를 팔며 단골들과 인사 나누는 상상을 하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사장이니 당연히 바리스타 자격증이 필요할 듯싶었다. 커피숍을 과거에 운영했던 동네 동생이 나를 순진하다는 듯 본사에서 모두 지원해 주고 교육시켜 줘서 바리스타 자격증이 필요 없다 했다. 줄 서서 테이크아웃을 하지 않는 한 웬만큼 팔아서는 돈이 별로 되지 않는다고 만류했다.
그러고 보니 음식점을 차린다고 조리사자격증을 따진 않는구나 싶다. 하지만 그냥 그런 음식점말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 되려면 자격을 갖추면 좋겠지. 미래의 나의 맛있는 커피맛 카페를 위해 바리스타를 따고 싶었다. 맛있으면 줄 서겠지 하는 근자감이랄까?
친구 둘과 함께 청소년문화센터에서 개강하는 바리스타 초급과정을 신청하자고 약속했다. 후군의 유치원 때 친구의 엄마인 영이는 아이가 셋이 있다. 셋째 아이가 비로소 학교에 입학하고 드디어 찾아온 자유시간을 의미 있는 배움의 시간으로 채우고 싶어 했다. 후군의 초등학교 친구의 엄마인 원이 언니는 이사 와서 찐하게 사귄 첫 번째 이웃이다. 서로 모르는 그 둘과 나까지 셋이 수강신청을 하는데 손이 느린 나만 광탈했다.
그 둘은 나만 믿고 셋이 하자고 신청한 것인데 나만 수강신청을 못한 것이다. 스마트폰 병신 같이 느껴지고 느린 내 손가락이 한심했다. 혹시 취소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대기를 걸어놨지만 개강 때까지 아무도 취소하지 않아 나의 바리스타 꿈은 한번 더 날아갔다. 셋이 다 같이 수업을 들으며 즐겁게 커피 향과 향기로운 수업을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컸다. 아쉬운 데로 수강신청에 성공한 영이와 원이언니의 바리스타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밥을 먹곤 했다.
어쩐 일인지 수업 횟수가 누적될수록 두 명의 얼굴이 병든 사람처럼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수업이 있는 목요일 전날부터 카톡방이 시끄러웠다. 기대했던 향기롭고 우아하며 웃음이 넘치는 커피수업 대신 신경질과 윽박지름이 난무한 전쟁 같은 커피수업에 대한 공포로 잠도 오지 않는다는 내용의 카톡을 보내왔다.
정작 중요하지도 않은 린넨 수건의 위치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폭격기 같은 고함소리가 꽂힌다 했다. 필기를 하며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 필기하는 사람이 제일 못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줬다. 아침에 입실하며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고 문 닫고 들어오라며 군기를 잡았다.
제일 앞자리에서 열성적으로 필기하고 수업 들었던 수강생이 첫 번째로 그만둘 때 남편까지 찾아와 인격적으로 덜 된 사람이 어떻게 수업을 하냐고 따져 물었다. 어쩐 일인지 데스크에서는 전혀 몰랐다는 반응으로 일관했고 싫은 놈이 나가라는 방식이었다. 강사의 위치가 갑이라 그러했을까? 센터와 강사 사이에 이익관계를 알지 못하지만 센터의 이런 태도로 미뤄 짐작컨대 새로운 강사를 뽑고 강의를 개설하는 수고로움이 싫었을 거라며 우리끼리 추측했다.
수강생들은 매 수업마다 머신 앞에서 줄 서서 혼나기를 기다리는 진귀한 수업을 받았고 하나 둘 그만둬 급기야 소수만 남았다. 성품이 원체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고 순한 영이와 원이언니는 그 소수에 속했다. 15명 정원의 수강생들은 점차 줄어들어 결국 5명만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
강사는 분노조절을 할 생각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온갖 화를 수강생들에게 여과 없이 폭격해 댄 덕분에 원이언니는 위가 아프다 했고 영이는 불안증상을 호소했다. 위너는 스마트폰 병신 나였다. 바리스타 수업이 완전히 끝난 후에도 수업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둘이 만날 때마다 바리스타 선생님이야기를 하도 해대서 나중에는 나까지 수업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약한 영이는 다시는 처다도 보기 싫다며 바리스타에서 사용했던 앞치마까지 팔아버렸다. 불평의 감정들은 이염되어 급기야 바리스타에서 혼난 이야기 금지라고 그만하라고 나 영원히 바리스타 안 할 거라고 못 박으며 바리스타 쪽은 처다도 보지 않게 되었다.
모든 우주의 기운이 바리스타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 나는 아무래도 남이 타주는 커피만 마실 팔자인가 보다. 수강신청을 못해서 정신건강을 지킬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