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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Jul 06. 2024

너의 가브리엘이 되어줄게.

내게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 기회가 생긴다면?

  박보검이 나오는 'My name is 가브리엘'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봤다. 코로나 이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방송사에서 여행을 주제로 예능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계속 같은 포맷으로 반복되자 흥미가 서서히 떨어져 갔다.


  흔한 여행 프로그램이려나 하고 넘기려는데…..세상해 가브리엘이라니! 역시 김태호 pd인가? 이름부터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콘셉트 또한 여행자의 시각이 아닌 타인의 삶 속에서 72시간 동안 누군가가 되어 보는 것이다. 공항에서 내리는 순간 난 그곳에 사는 가브리엘이 되어 삶을 살아간다. 그곳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또 나의 지인들은 누구인지 나의 아침을 어떻게 시작했는지 모든 것을 가브리엘이 되어 살아본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본다. 어떤 기분일까?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의 남성 합창단을 이끌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아일랜드의 가브리엘 이름은 루리이다. 루리가 되어 살아보며 박보검이 느꼈던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졌다. 배우를 하며 수많은 인생을 연기했을 텐데 실제 삶의 역할은 연기와는 달라 보였다. 대신 살고 있는 루리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며 존중하는 박보검의 태도가 진정성 있게 와닿았다. 루리가 어떤 분이길래 이토록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은지 프로그램 후반으로 갈 수록 더욱더 궁금해졌다.


  <My name is 가브리엘 방송 중 한 장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지인들은 뭐라고 기억하고 설명할까? 누군가 나 대신 나의 역할을 한다면 그는 무엇을 느낄까? 예능을 보며 다양한 생각이 스쳐간다.


  지금 내가 당연한 줄 알고 누리고 있는 나의 삶은 아이가 없는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엄마의 자리 일 수도 있고, 수 년 전 부모님께서 돌아가셔서 다시는 부모님을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분들을 만날 수 있는 애절한 자리이기도 하다. 내 옆을 든든히 지켜주는 남편이 있는 삶이기도 하며 투병 중인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는 친구들이 있어 마음이 힘들 때 언제라도 연락을 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봐도 내 주변에는 사람 밖에 남는 게 없는 삶이구나 싶다. 매일 더 나은 삶과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을 욕망하며 살고 있는데 가브리엘을 보며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열망하는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1년 전에 나는 오늘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어떤 고민을 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이나 고민들은 먼 미래도 아닌 단 1년 후에 몇 가지나 생각이 날까? 걱정한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면 걱정을 그 자리에 내려두고 편하게 살고 싶다. 내가 가브리엘이 되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게 되면 적어도 고통스럽고 불행하지 않았으면 한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내 삶을 공개하면 반응이 어떨지 가늠이 안된다. 보통 용기로는 안되겠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 기회가 생긴다면? 난 주저하지 않고 나의 엄마의 엄마로 살아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며 엄마는 외할머니가 미웠지만 눈물이 난다고 슬퍼하셨다. 난 할머니의 죽음에 마음껏 슬퍼하기만 할 수 없는 엄마가 한없이 가엽고 또 가여웠다.


  엄마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그 때에는 흔하지 않았던 이혼을 하셨다. 어린 시절 엄마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아 외로웠다는 엄마는 늙그막에 외할머니가 엄마의 손길을 바랄 때마다 혼잣말로 "어릴 때 나를 키워만 줬어도 내가 이런 마음이 안 들지." 원망 섞인 말을 하면서도 할머니를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서러움은 평생 엄마를 따라다녔다. 내가 우리 아이를 키우는 모습을 보며 엄마는 가끔씩 슬픈 눈을 지으셨다. "네가 아들내미 물고 빨고 이쁘게 키우는 걸 보면 엄마 어릴 때가 생각나. 내가 봐도 아기 때 이렇게 예쁜데 왜 그렇게 어린 나를 두고 가셨을까."



  어린 시절의 상처는 어른이 된다고 스스로 알아서 낫지 않는다. 이제는 손주까지 본 엄마인데 어린 시절의 아이로 돌아가 슬퍼하셨다. 내가 우리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서 금이야 옥이야 살뜰하게 키워주고 싶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엄마에게 멋진 피아노를 선물하고 싶다. 매 순간 엄마가 필요할 때 외롭지 않게 곁에 있어주고 싶다. 이런 엄마가 나는 너무 애처롭고 불쌍해서 할머니 장례식에서 엄마를 꼭 안아드렸다. 친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원망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괴로워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예쁜 나의 엄마를 낳아주셔서 외할머니께 감사하다고 위로해 드렸다. 엄마 외로웠겠다고 마음껏 원망하고 미워하고 투정 부리라고. 감사는 내가 할 테니. 꾹꾹 눌러 눈물만 흘리던 엄마가 나의 위로에 소리 내어 우셨다.

  무엇이 엄마를 이렇게 억누르고 있을까? 엄마의 가브리엘이 되어 우리 딸 엄마없이 크느라 그동안 참 힘들었겠다고 안아주고 마음껏 예뻐해주고 싶다. 나에게 기회가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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