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스포츠머리로 이발을 했다. 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신발을 신고, 머리 모양마저도 다 엇비슷하게 만들어 놓으니, 학교가 장난감 나라처럼 느껴졌고, 학생들은 그 나라 안에 사는 장난감 백성들 같았다.
초등학교는 왕과 백성만 있었다면, 중학교는 갖가지 계급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물론 그 모든 계급을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왕이었지만.
중학교는 다양한 왕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과목에 맞춰, 당구 큐대, PVC봉, 하키채, 장구채, 야구 방망이 등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여학우들이 없는 공간은 사춘기 남자들이 이성으로부터 잘 보이고 싶은 최소한의 본능마저 거세시키고, 야만성과 폭력성을 더 드러나게 만들었다.
입학 후, 3개월 정도가 지나자 각각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하나의 중학교 학생으로 어우러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별명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자연스레 전부터 따라다니던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별명은 여전히 ‘빨갱이’였고, 그 익숙한 단어가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중학교에서도 이어진 육상부 활동은, 교실에서 생활하는 시간보다 체육실과, 운동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 많게 만들었고, 무어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보다는, 키가 크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평범해지고 있는 내 두 다리가 더 신경쓰였다.
시합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조금이라도 기록을 단축시켜 보고자 스타팅 블록을 이리저리 조절해 출발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체육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빨갱이 요 와바!”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아이들의 왕이자 육상부의 주장이었던 3학년 선배였다. 나는 전속력을 다해 체육실로 달려갔다.
“오~ 새끼 빨리 튀어오네. 귀엽구로. 니 백미터 얼마 뛰노?” 다정하게 말하는 주장의 말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6학년 마지막 대회 때 12초 8나왔는데요.”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른 웃음을 지으면 대답했다.
“이 새끼 쪼개는거 보소. 웃기나 새끼야? 12초 8이면 완전 좆밥이네. 새끼 그거삐 못 뛰면서 육상부는 우째 들어왔노! 꼬추에 털은 났나? 히야가 함 보자!” 체육실 안의 아이들은 쿡쿡대며 웃었고, 바지를 벗기려 하는 주장의 제스츄어에 당연히 장난이겠거니 생각하며 나는 미소를 잃지 않고 주장의 손을 조심스레 뿌리쳤다.
“니 뭐하노? 디지고 싶나? 씨발 어디서 손을 마음대로 막 나대노. 차렷 자세로 가만히 있어라이 털 났나 안났나~ 히야가 함 확인해보꾸마.”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주장이 말했고, 1990년 그날처럼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형, 내 배가 좀 아파서 카는데 화장실 좀 댕겨오면 안 될까요?”
“응 안된다. 가고 싶으면 꼬추 비주고 갔다온나. 아니면 히야가 따라가주까?”
“아~ 쫌 와카는데요.” 대답과 동시에 그의 발이 내 배로 날아왔다.
“씨발새끼 이거 완전 쳐돌았네. 선배가 말하는데 와카는데요? 좋은 말로 할 때 바지 벗어라이.” 배를 맞고 쓰러진 내 머리 서서 그가 말했다.
“싫은데요. 내가 와 벗어야 되는데요!”
“아놔 이 빨갱이 새끼. 이거 진짜 미친새끼네. 야 한놈 밖에 나가서 망보고 부실 문 잠궈.” 그의 말에 따라 1학년 중 하나가 신속하게 밖으로 튀어 나갔고, 2학년은 문을 잠그고 문 앞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배가 미친 듯이 아파왔다.
“빨갱이 니 바지 벗을끼가~ 안 벗을끼가?”
“형 와이라는데요” 그의 손바닥이 내 눈앞을 스쳐가고, 불꽃이 번쩍거렸다. 또래 집단의 폭력은 어른들의 체벌보다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만, 더 야만적이고,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마지막으로 얘기한다. 바지 벗어.”
“싫다. 씨발새끼야.”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폭력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씨발새끼? 하~ 이 새끼 이거 진짜 완전 쳐돌았네.” 주장의 손이 다시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다시 불이 번쩍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살짝 눈을 떠보니, 코치 책상 위에 놓인 양철 주전자가 보였다. 주장의 손과 발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내게로 향했고, 나는 그 손과 발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코치의 책상까지 뒷걸음쳐 갔다.
한 손으로는 얼굴을 계속 가리고 있고, 쓰러지는 척 다른 한 손으로 책상 위의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가 다시 내게 발을 뻗는 순간에 맞춰 손으로 잡은 주전자를 휘둘렀다. 1/3쯤 물이 차 있던 주전자는 묵직한 무기가 되어 그의 얼굴을 뭉개버렸고, 코에 맞았는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주장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위에서 주장의 머리를 주전자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한 번씩 칠 때마다 물은 내 손을 타고 흘러내렸고, 퍽퍽하며 내던 소리가 텅 빈 주전자에서 울리는 챙챙으로 바뀔 때까지 쉬지 않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육상부실에 있던 그 누구도 나를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작은 왕이 쓰러지고,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과정을 숨죽여 지켜봤을 뿐. 정신없는 구타의 현장에 종지부를 찍은 건 망보고 있던 상철이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코치 온다! 온다!”
아이들은 육상부실 안에서 벌어진 사태에 대해 어찌할 바 몰라 우왕좌왕 거렸고, 아이들 뒤로 코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고 이거!” 육상부실의 처참한 광경을 본 코치는 어안이 벙벙한 자세로 물건이 떨어지고, 피가 튀어 난장판이 된 공간을 보았고, 쓰러져 있는 주장을 흔들어 깨웠다.
“야 문 열어!” 피범벅이 된 주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사태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코치는 주장을 업고 주차장으로 달렸고, 나는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