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호성은 한번 더 이홍수의 집에 들러 이홍수의 귀가여부를 살펴보고 극장가를 배회했다. 이홍수가 눈치를 채고 도망을 친 것인지... 이대로 돌아가면 켄타가 가만두지 않을 거 같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성은 숙희의 집으로 가보기로 했다.
켄타는 호성을 보내놓고 김노인과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상수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았다.
“10년을 키웠네. ”
김노인이 어색한 침묵을 깨며 말했다.
“집 앞에서 동냥하던 어린것이 불쌍해서... 나 역시 외롭기도 했고. 그게 벌써 10년이야. 부모가 살아있었더라면... 내가 친부모만큼 잘해주진 못했겠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서 키운 자식이네. 그런데.. 왜.. 왜.. 우리 상수에게.. ”
켄타는 차마 김노인을 바라보지 못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라는 건 켄타 역시 알고 있었다.
3년 전 그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노인은 자신의 앞날보다는 자신으로 인해 상수에게 피해가 갈까 봐, 상수만은 지켜달라고 사정하던 김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홍수 도대체 그놈이 왜 우리 상수를...”
켄타는 말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홍수는 부족한 것 없이 곱게 자라온 부잣집 도련님으로 보였는데 도대체 그가 왜 이런 잔인한 살인을 벌이고 있는지 켄타 역시 궁금했다.
“그놈을 꼭 잡아 주시게나.”
“그렇게 하죠.”
자신이 몇 년이나 추적해서 잡은 독립군, 늘 광채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위축시켰던 김노인이 지금은 그저 자식을 잃은 노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켄타는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상수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다시 한번 살폈다. 전날 세차게 내린 비덕에 현장은 특별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켄타는 김노인을 향해 짧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갔다.
힘든 일을 겪은 피해자를 위로하고 싶은 경찰의 마음이었는지, 연모하는 여인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켄타는 숙희가 일하는 다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부님 오셨어요?”
평소와는 다르게 수진이 켄타를 맞이했다. 켄타는 두리번거리며 다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숙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숙희는 어디에 갔나?”
“오늘따라 유난히 더 숙희를 찾으시네요 다들.”
“그래서 숙희는 어디에 갔나?” 켄타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말도 없이 나갔는데, 집에 갔겠죠. 어제 일도 있고 일할 정신이 어딨겠어요 지금. 안그래도 조금 전에 김순사님이 오셨다 가셨어요.”
“호성? 그놈이 왜?”
“왜라니요. 당연히 걱정이 되겠죠. 숙희가 그래도 제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김순사님인데. 김순사님도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걱정되겠어요. 숙희가 자기 좋아하는 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뭐?” 켄타는 수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숙희가 누구를 좋아해?”
“왜 그렇게 깜짝 놀라고 그러세요. 숙희가 김순사님 좋아하는 거 모르셨어요?”
꽉 쥔 켄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제쯤 갔지?”
“이제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경부님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수진은 주방에 있는 옥경에게 손짓으로 뭐라 신호를 보내고 켄타의 팔을 잡아 자리로 안내했다.
“아니.아니. 차는 다음에 마시도록 하지.”
켄타는 수진의 손을 뿌리치고 다방 밖으로 나갔다.
경찰서로 돌아가는 중 호성은 숙희와 호성을 떠올렸다. 숙희를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호성 또한 그 일부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숙희가 호성을 좋아한다는 수진의 말에 켄타는 더욱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 곰 같은 녀석이 뭐가 좋다고.’
경찰서에 돌아오니 유치장에서는 인력거 끌던 최씨가 자신들을 풀어달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진범이 나타났으니 자신들은 더 이상 용의자도 범인도 아니라고 악을 써대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들을 무시하고 켄타는 조용히 경찰서 밖을 나왔다. 지금 켄타가 편하게 있을 공간은 아무 곳도 없었다. 마음이 혼잡해서인지, 조급증이 났다.
‘숙희가 보고싶다.’ 켄타는 숙희의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