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목을 축인 호성은 극장가에 있는 술집들을 뒤지고 다녔다. 이제 해가 기울기 시작한 터라 손님들이 많지 않아 이홍수의 존재유무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여기저기 다니던 터라 시장기가 돌았다.
호성은 국밥집에 들러 국밥 하나와 막걸리를 한 병 시켰다.
근무 중에 술을 마시지 않는 그였으나, 오늘은 한 잔 마시고 싶었다. 국밥과 막걸 리가 함께 나오고 호성은 나무그릇에 막걸리를 채웠다.
한 잔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국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떠 입에 넣는다. 뜨거운 밥알갱이들이 입 안에서 춤을 췄다.
호성이 막걸리와 밥을 먹는 동안 해는 서서히 기울어 어둠이 밀려왔다.
다시 이홍수의 집으로 가야 할지, 다시 극장가를 한 번 더 둘러봐야 할지 호성은 고민에 빠졌다.
숙희는 집으로 바로 가려던 계획을 접고, 마을을 다 둘러보기로 했다. 인력거를 끄는 박씨에게 부탁해 가고 싶은 것들을 말하고, 잠시 내려 눈에 담고 다시 움직이길 몇 시간째, 어둠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거니와, 집만큼 안전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력거꾼에게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인력거에 앉는다. 극장가엔 어둠을 밝히는 불이 하나 둘 켜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오싹함이 느껴진다. 괜한 기분 탓인가. 숙희는 부엌으로 먼저 가서 씻을 물을 데우기로 했다.
이홍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투박한 발자국 소리가 아니어서 숙희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이홍수는 숨을 죽인 채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들려왔고, 물을 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정도 물을 옮기는 시간이 지나고 방 쪽으로 발자국 소리가 옮겨질 때 이홍수는 최대한 집중했다.
“저벅. 저벅. 저벅”
방문이 열리고 숙희가 들어오는 순간 이홍수는 준비하고 있던 보자기로 숙희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흡! 흡!” 숙희가 고통스러워하며 버둥거렸다.
이홍수는 숙희의 몸 위에 올라가 숙희를 제압하고 얼굴을 덮은 보자기를 풀어 입에 재갈을 물렸다.
숙희는 이홍수 아래 깔려 이홍수를 노려봤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홍수는 위에서 숙희를 내려다봤다.
숙희는 이홍수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비실해 보이던 몸이었지만 남자는 남자. 아무리 애를 써도 이홍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홍수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숙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숙희는 발버둥 치는 것을 포기하고 온몸에 힘을 풀었다.
“그래. 얌전하게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더 이쁘지.” 이홍수는 실실 웃으며 숙희에게 말했다.
숙희는 이홍수의 머리에 난 상처에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 오는 길에 골동품집 영감을 만났는데, 그 영감이 다짜고짜 나를 보더니 이렇게 치지 뭐야. 나 원참 무슨 일인지.”
이홍수는 자신의 상처를 쳐다보는 숙희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툭 던지고는, “우리 뭐부터 시작하지?” 하며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소리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숙희가 이렇게 심하게 저항할 거라고는 계산하지 못했다. 이홍수는 보자기를 하나만 준비해 둔 걸 후회했다.
숙희의 위에서 이홍수는 숙희에게 소곤거리며 말했다.
“숙희 내 마음 알잖아. 나는 그냥 네가 좋을 뿐이라고. 당신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아. 만약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내려갈 수도 있어. 물론 입에 물린 그것도 풀고 말이야.” 이홍수는 나긋나긋하게 말하면서도 아까 부엌에서 챙긴 부엌칼을 허리춤에서 꺼냈다.
숙희는 칼을 보고 놀란 토끼눈이 되었다. 하지만 곧 이홍수의 말을 수긍한다는 뜻으로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고. 이홍수는 숙희 위에서 내려왔다.
부엌칼을 손에 꼭 쥔 채 숙희를 방구석으로 몰아 앉혔다. 입에 물린 보자기를 풀고 둘은 마주 앉았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예요?” 숙희가 따지듯 물었다.
“몰라서 물어? 나 숙희를 좋아한다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럴수가 있어요. 어제도 그렇고... 나 너무 무서웠다고요.” 숙희는 흐느껴 울었다.
숙희의 눈물에 이홍수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 이봐 숙희 어제는 내가 술이 너무 과해서 그래. 미안해. 그. 그렇지만 내가 자넬 해치거나 그러려는 게 아니야. 나는 정말 자넬 좋아한단 말야.” 이홍수는 사죄하듯 숙희에게 말했다.
“그럼 그 칼부터 좀 치워버려요. 그게 뭐예요. 살인자도 아니고.”
“살인자라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대신 우리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이홍수는 숙희에게 다짐을 받고 칼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어제 얼마나 마신건지 사실 기억이 다 나진 않아. 내가 숙희를 따라갔던 거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 내 뒤를 누군가 쫓아왔다는 느낌이 있었지.”
숙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방바닥만 쳐다보았다.
“숙희집으로 오는 길에 또 무슨 사건이 터졌더구먼, 극장가에서도 사람들이 술렁이고 사람이 또 죽은 모양이야.”
“정말.. 모르세요?” 숙희는 이홍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얼 말이야?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그건 그렇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조금 시장한데. 뭐 먹을 건 없나?” 이홍수는 다정스레 숙희에게 물었다.
“집에서는 통 뭘 해 먹지 않아서...”
“그렇겠구먼...” 실망한 듯 이홍수가 대답했다.
“저번에 수진언니한테 선물 받은 술이 한 병 있긴 한데. 그거랑 감자라도 드시겠어요?”
“술이라. 좋지! 좋지!” 이홍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나가서 금방 차려 올게요.” 숙희가 방을 나서려고 하자 이홍수는 뒤에서.
“혹시나 다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섬뜩한 목소리다. 방금 전 나긋한 목소리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었다.
숙희는 대답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이대로 뛰어나가 도망을 칠까. 아니야 지금 도망치면 바로 붙잡힐지도 몰라. 어떡하면 좋지.’ 숙희는 불안감에 어찌할지 머리가 복잡했다.
우선은 이홍수의 기분을 맞춰주기로 했다. 기분이 좋아지고 경계심이 사라질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숙희는 구겨진 옷들과 쪽진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소박한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이홍수의 잔에 술을 따르고 삶은 감자를 까서 놓았다.
이홍수가 술을 한 잔 들이키고 기분이 좋은 듯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숙희는 껍질을 깐 감자를 이홍수에게 건넸다.
빈속에 마신 술이라 그런지 이홍수는 금세 취기가 올랐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바라본 숙희는 더욱 아름다웠다. 이홍수는 술상을 옆으로 밀고 숙희에게 달려들었다.
숙희는 크게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홍수는 숙희에게 입술을 맞추고 자신의 윗도리를 벗고, 숙희의 저고리도 벗기려 했다.
속살이 드러난 숙희는 더욱 매혹적이었다. 결혼을 했다고는 하나 짧은 기간, 아이를 낳은 적도 없는 처녀의 몸과 다름없었다. 이홍수는 술에 취해 또 숙희에게 취해 몽롱하게 정신을 잃어갔다.
이홍수가 숙희의 몸을 더듬거리던 그때 숙희는 머리에 꽂혀있던 비녀를 꺼내 이홍수의 목을 사정없이 찔렀다.
피가 온 사방에 튀어 올랐고 이홍수는 깜짝 놀라 목을 잡고 방바닥을 기어 다녔다. 숙희는 차분하고 냉정하게 기어 다니는 이홍수를 쫓아가 다시 목을 찌르고 또 찌르고, 숙희의 얼굴과 온몸에 피범벅이 되었지만 숙희는 멈추지 않고 찌르고 또 찔렀다.
짧은 경련과 함께 이홍수의 몸이 축 늘어질 때까지 숙희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이홍수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자 그제야 숙희도 비녀를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과 벽 할 것 없이 온 사방이 이홍수의 피로 물들었다. 여전히 이홍수의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흐르는 피는 숙희의 발마저 빨갛게 물들였다.
숙희는 방을 나와 아까 데워 두었던 물을 찬물과 섞어 몸을 씻어냈다. 물을 붓자 몸에 묻은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빨갛게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