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숙희는 집으로 가려했으나 혼자 있기에 너무 무서워 수진과 다방으로 돌아갔다. 다방 안은 어제의 사건으로 시끌벅적했다.
다방에 있는 손님들은 숙희를 보며 저마다 걱정과 위로의 말을 건넸고 숙희는 그들을 보며 생긋 웃어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어느 테이블이건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앉아 적당히 손님들의 기분을 맞춰주며 돈을 벌었겠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이곳이 지금은 더 마음이 편했을 뿐. 그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누거나 웃을 수 있는 마음은 아니었다.
숙희가 멍하게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옥경이 슬그머니 숙희 곁으로 다가와 위로를 해줬다.
“언니 괜찮아요?”
“응 괜찮아.”
“어휴, 이 얼굴 좀 봐. 정말 큰 일 날 뻔했어요.”
“그러게 말야.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지...” 숙희는 서글픈 듯 옥경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데 언니, 정말 그 이선생이 범인예요?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사람을 그렇게나 죽였을까. 그리고 이선생 몸도 좀 부실하잖아요.” 옥경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숙희에게 물었다.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니?” 숙희는 정색하며 옥경을 째려봤다.
“아니.. 그게 아니고. 그 양반이 사람을 죽일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서요.”
옥경은 계속 말하려다, 숙희의 얼음장 같은 눈빛을 보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숙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세상 사람들 중 몇이나 살면서 그런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까. 어제 상수를 죽이던 그 사람. 그 눈빛을 떠올리니 숙희는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가는 게 낫겠어.” 숙희는 혼자 중얼거리며 다방 밖으로 나섰다.
걸어가려다 숙희는 인력거를 타기로 결심했다. 인력거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숙희는 극장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극장가는 낮보다는 덜하지만 저마다의 저녁의 삶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제 여기도 곧 떠나야겠어.’ 숙희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던 마을을 둘러보는 사람처럼 극장가의 모든 것들을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이홍수는 숙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홍수는 아까 맞은 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지금 상황을 생각해 봤다.
왜 그 골동품 가게 영감이 자신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면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영감에게 악감정을 살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감과 호성이 바라보고 있던 시신.
‘그 시신은 누구일까. 영감이 슬프게 울고 있던 걸로 보아 그 영감과 관련된 사람인데...’
하루종일 먹은 것이 없어 이홍수는 갈증과 허기짐을 느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물을 한 잔 마시고 먹을 것을 찾아보았으나 특별히 먹을 것이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홍수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호성은 이홍수의 집을 찾았다. 생각했던 대로 이홍수는 집에 없었고, 가족들은 순사가 집안으로 들어오자 사색이 되었다.
호성은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이홍수가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딘지를 물어봤다. 다방과 술집. 부잣집 도련님 삶의 동선은 크게 복잡하지 않았다. 호성은 다방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다방엔 수진과 옥경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호성은 다방 내부를 둘러보니 이홍수도 숙희도 보이지 않았다.
“김순사님 바쁘실 텐데 어쩐 일이세요? 숙희가 걱정돼서 오신 거예요?” 호성을 발견한 수진이 반갑게 말을 건다.
“그건 아니고, 혹시 이선생 여기 안 왔는감?”
이선생이란 말에 수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작자가 염치가 있으면 여기 오겠어요?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몹쓸 놈이에요.” 수진은 혹시나 이상한 소문이 들어 손님이 줄어들진 않을지 걱정이다. 안그래도 돈깨나 있는 단골들에게 자꾸 문제가 생겨 벌써부터 가게 매출에 영향이 있는 처지였다.
“숙희는 어디 갔는감?”
“집으로 갔나 봐요. 고것이 아무런 말도 없이. 하긴 걔도 지금 제 속이 아닐 거예요. 오늘은 이해해 줘야지.” 수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겠구먼. 오늘도 엄청스레 덥구먼. 나도 시원한 거 뭐 하나 마실 수 있을까?”
호성이 양쪽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머! 제정신 좀 봐. 저기 잠시 앉아 계세요.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수진은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경쾌하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