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성은 숙희집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숙희 있는감?” 호성이 느릿느릿 말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자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호성은 빠른 발걸음으로 숙희의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홍수가 처참하게 죽어있었다.
“오셨어요?” 숙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인감?” 호성이 숙희에게 묻는다. 숙희는 어느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마저 단정하게 정리한 상태였다. 하지만 숙희 손에 나있는 상처를 보고 호성은 숙희가 한 짓이란 걸 눈치챘다.
“왜 죽였는감?” 호성은 숙희를 바라보고 물었다.
“김순사님 우리 이제 떠나요.” 숙희는 호성을 보고 대답했다.
“떠나다니? 무슨 말을 하는겨?”
“이 마을을 떠나자구요. 우리 다른 곳에 가서 함께 살아요.” 숙희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지금.. 사람을 죽여놓고 웃음이 나오는감? 제정신인거여?” 호성은 화를 내며 말하지만 크게 동요되지 않는 듯했다. 수많은 시체를 보아서였을까 호성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이제 어떡할거여.”
“어떡하긴요. 떠나자니까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을 소릴.”
“짐승 같은 놈이었어요. 처자식도 있는 놈이 짐승처럼 여자만 밝히다가. 사람 같았으면 제가 죽이지 않았겠죠. 저런 놈을 죽이는 일은 돼지새끼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요.”숙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호성은 숙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피를 뿌려댔는지 마치 처음부터 빨간색으로 만들어져 있던 방인 듯 온통 피투성이였다. 호성은 우선 바닥에 있는 피를 닦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순사님!”
“부엌에 가서 물 좀 받아와야겠구먼.”
“이미 끝났어요...”
“뭐가 끝난단 말이여. 언능 가서 물이나 받아와.” 호성은 걸레질을 멈추지 않으며 숙희에게 말했다.
숙희는 마지못해 물을 떠오면서 호성을 돕지 않았다.
호성은 쉼 없이 물을 뿌리고 바닥을 닦았다. 어느정도 바닥에 있는 피가 지워지자 벽에 물을 뿌렸다. 물을 뿌리고 닦고 쉼 없이 움직이지만 벽에 붙어 말라버린 피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제기럴!” 호성은 털썩 주저앉았다.
“순사님 우리 떠나요. 나랑 같이 떠나줘요.”
“어디를 떠난단말여! 이대로 가면 숙희가 다 죽인 게 되는구먼! 도망가봤자 죽을 때까지 쫓기면서 살아야 된단 말여!”
“그런건 상관없어요. 순사님.. 순사님이 날 지켜주면 되잖아요.”
“젠장할! 내가 무슨 수로 숙희를 지킨단 말여!”
“저를 잡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순사님이 처리해주시면 되잖아요. 어제처럼. 어제 상수한테 한 것처럼요.”
호성은 물끄러미 숙희를 바라봤다.
“자네 봤는가?”
“어제.. 저 다 봤어요. 폐가에서 상수를. 어둡고 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제가 순사님을 몰라볼리 없잖아요. 다 봤다고요. 순사님이 상수를 찌르고 돌로 내려치고 웃으며 상수에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까지 다 봤다구요.”
순간 호성의 눈빛이 변했다.
“허허.. 그렀구먼. 허허허허. 그래서.. 허허허 어디로 떠나자는거지?” 호성을 히죽이죽 웃으며 숙희에게 대꾸했다.
그 순간 숙희는 오싹함을 느꼈다. 평소에 숙희가 알던 호성의 눈빛이 아니었다.
호성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숙희에게 다가갔다. 숙희는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뒷걸음을 쳤다.
“어디가는겨? 같이 떠나자면서 왜 뒤로 물러나는감?” 호성은 숙희에게 점점 다가갔다.
“어..어디로든요.. 사람들이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새롭게 시작해요.”
“우리를 모르는 곳이라.. 뭐 어떻게 새롭게 시작한다는건감.”
호성은 천천히 숙희에게 다가갔다.
“기..김순사님 무서워요. 오지 마세요.”
“허허허허허 사람도 죽인 양반이 뭐가 무섭다는거여. 이러면서 뭘 같이 떠나자고 하는거여.”
“김순사님.. 저.. 괜찮은거죠?”
“잉? 뭐가? 뭐가 괜찮냐는겨?”
“저는 죽이지 않을거죠?”
“왜.. 죽는 게 두려운감?” 호성은 이빨을 보인채 씨익 웃었다.
호성의 미소를 본 숙희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 미소는 평소 호성이 짓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아니었다.
“김순사님...”
호성은 숙희의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흐흐흐. 나는 꽃은 죽이지 않는구먼. 이렇게 꽃처럼 이쁜데 어떻게 죽인단 말여. 보기 싫은 것들만 죽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구먼.” 호성은 천천히, 천천히 숙희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도망갈 필요 없이 나하고 여기서 살면 되는구먼. 그런데 그전에 나를 좀 도와줘야겠구먼.” 호성은 방에서 이불과 천을 가져와서 숙희를 나무에 묶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호성은 숙희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어느 정도 단단히 숙희가 나무에 고정되자 호성이 담배를 꺼내물며 말했다.
“아마. 여기로 누군가 올 것이구먼.”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대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왔나보구먼.”
호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켄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