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짝을 딱! 때려주고 싶어
07 / 소리를 이기는 소리를 아시나요?
자율, 감각, 쾌락, 반응. 이들 영어 단어의 두문자를 따서 ASMR 또는 백색 소음으로 부른다(그러니까 일반적인 소음은 검은 소음이라는 뜻이겠다).
익은 옥수수를 따고 남은 줄기에 스치는 바람 소리, 화장품 뚜껑 여닫는 소리, 서랍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뒤적이는 소리, 칼로 연필을 깎고 심을 다듬는 소리, 연필로 꾹꾹 눌러 글 쓰는 소리,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뭔가를 깊이 생각하며 노트북 자판을 하나하나 찍어가는 소리.
뇌에 자극을 주어 심리적 안정을 꾀하는 백색 소음들.
올해 쉰 살의 그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회사 다니는 아저씨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예뻤다. 졸업을 하고 직장에 들어갔다. 월급 모아서 부모님을 도우려고 하던 때 아저씨가 차로 납치하다시피 해서 성폭행을 했다. 단 한 번에 임신이었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지만 이것이 운명이겠거니 하고 결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노력하면 행복은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순진했지요.”
운명치고는 악운이었다. 죽자사자 따라다니던 때와 다르게 배가 불러오는 아내를 때렸다. 예전의 몸매 고운 그녀가 아니라며 주먹도 아니고 칼이나 깨진 소주병을 휘둘렀다.
참다 참다 4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식당 서빙, 함바 식모, 벽지 바르기 등으로 생계를 이었다. 험한 일을 해도, 나이가 들어가도 미모는 여전해서 남자들의 괴롭힘이 끊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니 한곳에서 오래 일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소문을 사실로 믿은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 살아갈 의미를 잃고 말았다.
“어느 날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죽어, 죽어!”
너무도 생생한 소리라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귀 기울이면 잠시 멈췄던 소리가 자리에 누우면 또다시 들렸다. 벽이나 천장에서 나는 소리인지, 장롱 속에 나는 소리인지, 가슴 속에서 나는 소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환청이 아니었다니까요. 분명히 누가 내는 소리였어요.”
밥을 먹을 수도 없고, 기운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근무력증도 생겨 호흡기를 끼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나온 후 본격적으로 죽기로 작정했다. 번개탄, 수면제, 목매달기 등.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분신을 시도했다.
“석유를 머리에 붓고 불을 질렀는데 연기가 밖으로 나가니까 집주인이 쫓아 올라오고…. 얼굴, 팔, 왼쪽 가슴에 화상을 입어서 여러 차례 이식 수술을 했어요. 방화에다 재물손괴죄. 하여튼 구속된 후 나라에서 치료를 도와준 건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거센 불길에 한쪽 귀가 녹아 없어졌고 얼굴도 일그러졌지만 귀에 들리는 소리는 여전했다. 그 거센 불길에도 소리는 타지 않았나 보다.
현재 기초 수급으로 생계는 겨우 유지하고 있지만 살아갈 힘이 없는 건 여전하다. 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없다면 그래도 힘을 내보겠는데.
할머니가 손자 배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부르는 자장가 소리, 타지에 나가 있는 자식에게 카톡 대신 손 편지를 쓰는 소리, 한 톨이라도 흘릴까 가만가만 쌀 씻는 소리, 빨래판에 빨래 치대는 소리, 그만 놀고 들어와 저녁 먹으라고 골목에 나와 아이를 부르는 엄마 목소리, 겨울철 아궁이에 불 지피는 소리, 부엌 구석에서 가만가만 끼얹는 목물 소리, 장작 패는 소리, 쌓인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
그의 등을 토닥여주고 싶지만 참는다. 그 토닥이는 소리마저 그에게 검은 소음이 될까봐. 아니, 토닥이는 소리는 그에게 백색 소음이 될까?
소리가 소리를 이긴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소리로 그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까(무슨 소리가 좋을지 아시는 분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