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기억수퍼 11화

기억수퍼 – 09 기억을 기억하는 방법

by Li Pul


청일에 사는, 일흔이 다 된 김규화 씨.

어릴 때 명절만 되면 아버지는 아랫목에 요를 깔고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들은 친척집 찾아가느라고 분주한데.

조금 크자 아버지가 말해주었다. 6.25때 인민군으로 내려와 어찌어찌하다가 남한에 남게 되었고, 어찌어찌하다가 혼잣몸으로 청일에 와 터를 잡고 결혼도 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는 외로운 신세라고. 그때 KBS 라디오 ‘오후의 교차로’에서 방송 끝날 즈음 이산가족 한두 명을 소개해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 엽서를 보냈지만, 일가친척을 찾지 못했다고.

그런 어느 날 KBS TV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게 나왔다. 이상하게 눈길을 끌어 그걸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내일 들깨 모종을 심을 건데 그거 준비 안 하고 테레비 보고 있다고 호령이었다. 그래도 TV를 계속 보다가 저녁에 아버지에게 말했다.

“오늘 보니까 67가족이 상봉했던데요?”

“그래?”

이튿날 비가 오는 가운데 우비를 입고 하루종일 들깨 모종을 심었다. 일을 마치고 밤에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았는데 그날은 110가족이 상봉했다. 가족 상봉을 보니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이거 봐라, 하는 생각이 들어 내일 서울 다녀오겠다고 하자 아버지가 말리지 않았다.

새벽 첫차를 타고 상경하여 KBS 앞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40분. 사람들이 벌써 인산인해였다. 대한적십자에서 줄을 서도록 해서 줄을 선 채 기다렸으나 기약이 없었다. 점심도 못 먹고 서 있는데 KBS 직원이 나와 신청용지와 함께 번호표를 나눠주었다. 받아들고 보니 19,000번. 한 달 보름을 기다려야 순서가 온단다.

그냥 내려갈 수 없어서 KBS 구내매점에서 종이와 매직을 사서 아버지가 찾는 가족의 이름을 죽 써서 중앙홀에 붙인 후 남들이 쓴 것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그날은 독산동 외사촌 누이 집에서 자고, 그 집에서 커다란 달력을 얻어 KBS로 가서 또 붙였다.

종이 앞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던 사흘째 되던 날, 키가 큰 젊은 여자가 규화 씨가 쓴 종이를 떼어내는 것이 아닌가. 그때 벌써 다들 종이를 써서 붙인 터라 더 붙일 자리가 없었다.

“내꺼 떼어내고 당신꺼 붙이는 그 심뽀가 뭐요? 천당 가기는 다 틀렸구먼!”

소리치며 자신이 쓴 종이를 빼앗으려는데 그 여자가 자기 엄마 사연과 비슷해서 그걸 엄마에게 가져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종이도, 쓸 것도 가져오지 않았던 터였다. 엄마가 5.16광장(여의도광장의 옛 이름이다)에 와있다는 말에 따라갔다.

과연 아버지 닮은 아줌마가 신문지를 깔고 앉아있었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우리 큰오빠가 걸어오는 줄 알았어. 똑 닮았어! 똑 닮았어!”

얼싸안는 아줌마에게 그래도 사연을 맞춰보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사람이 똑같은데 맞추고 말고 할 것 없다고 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찾는 사람 이름을 맞춰보니 역시나 틀림없었다. 아주머니가 바로 아버지의 친여동생이었던 것. 주변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시끌벅적하자 지나가던 KBS 촬영팀이 규화 씨에게 방송실로 가자며 데려갔고, 그 즉시 방송이 되었다. 친척을 찾은 게 이별 33년 만이었고, 7월4일 오후 2시30분이었다.

아버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얼른 연락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다. 전화는 청일면 봉덕리 약방에 하나 있는데 그리로 전화 걸려면 광화문 전신국까지 가야 했다.

나중에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방송을 직접 시청하다가 아들 규화 씨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는 앉은 자리에서 1미터나 펄쩍 뛰어오르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당장 서울 가자며 서둘렀고, 규화 씨는 규화 씨대로 전화 걸고 말고 할 것 없이 버스 타고 횡성으로 서둘러 내려가는 바람에 길이 엇갈려 재회는 그다음 날 이루어졌다.

“아버지에게 제일 큰 효도를 한 셈이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KBS에 가서 사연을 말하고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대서 쉽게 당시의 동영상을 구할 수 있었지요.”

규화 씨는 동영상을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아버지 생각이 나면 수시로 틀어본다. 거기에 저 먼 세월의 기억이, 그리고 20대의 규화 청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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