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1 공방
국정원은 두 언론사에 기자들을 연행한 사실을 통보했다. 국기 문란 행위와 허위사실 유포 여부 확인을 위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언론에서는 관련 보도가 연일 쏟아졌다. 하지만 대부분 대통령실을 둘러싼 의혹 보도였기에 대통령실 부담은 갈수록 가중됐다.
겨레와 조 부장은 서로 다른 방에서 꼬박 사흘 동안 조사받았다. 겨레는 “지금이 유신시대도 아니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잡아다 취조 해도 되느냐”고 반발했다. 조 부장 역시 “언론이 살아있는 한 당신들의 만행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역사에 반드시 기록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수단은 겨레와 조 부장에게 제보자 신상과 자료 입수 경위를 집요하게 물었다. 하지만 두 기자 모두 이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입을 맞춰 놓았다. 두 사람은 80시간여 만에 풀려났다. 각자 언론사에 복귀한 다음, 편집국장 주재 회의에 참석했다. 가서, 취조실에 있었던 내용과 상황을 소상히 보고했다. 양측 언론사는 대통령실에 공문을 보내 강제 연행과 장시간 조사에 항의했다. 야당은 정부 여당을 겨냥해 ‘언론 탄압’이라며 진상조사를 촉구했다.
국정원과 대통령실은 연행 과정에서 강제성은 없었으며, 장시간 조사한 이유는 국가 안보와 외교에 엄중한 사안이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여론은 대통령실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언론은 고려청자 도난 사건의 진실과 의혹을 연일 보도했다. 거대 야당인 민국당은 특검과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여당인 한민당을 압박했다. 대통령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총선을 1년 앞두고 벌어진 악재에 민심도 요동쳤다. 주말과 휴일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촛불집회가 광화문 광장을 뒤덮었다. 대통령실과 한민당 내부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통령은 한민당 지도부를 호출했다. 비서실장이 당 지도부를 대동하고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대통령은 소파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인기척 소리에 눈을 뜬 대통령은 일어나 당 지도부와 일일이 악수한 뒤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어서들 오세요. 수해복구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 운영과 의정활동에 다들 정신이 없을 텐데, 별안간 괴상한 일이 터져 여러분께 미안합니다.”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김신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마음고생이 크실 줄 압니다”라고 위로했다. 박초아 원내대표 역시 “저희가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해 송구할 따름”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비서실 직원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비서실장이 좌중에 차를 권했다.
“시원한 오미자차예요. 더운데 한잔 씩들 드시죠.”
선홍빛이 감도는 오미자차가 청자 다기에 담겨 상큼한 향을 풍겼다. 다기마다 얼음과 잣을 서너 개씩 띄워 청량함과 운치를 더했다. 대통령이 먼저 다기를 들자 나머지 인사들도 차례로 잔을 들어 입에 댔다. 집무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창문 밖에선 요란한 매미 소리가 귓전을 쟁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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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국민 기자회견은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장현수 대변인이 무겁게 건의했다. 당 지도부 모두 같은 입장이었다. 이미 그들은 용산으로 오기 전 그렇게 하기로 중지를 모았다. 장 대변인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대통령님께서 직접 국민들께 이번 일에 대해 소상히 밝힌다면 여론은 빠른 속도로 가라앉을 겁니다. 그렇다면 야당의 공세도 누그러질 것이고, 그사이 청자를 찾는다면 정상회담도 별 무리 없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듯 비서실장에게 “그렇게 하지”라고 말했다. 비서실장은 곧바로 참모진 회의를 소집했다.
당 지도부가 돌아간 자리에는 대통령실 홍보수석과 대변인단이 들어왔다. 비서실장이 상황을 보고했고, 홍보수석은 기자회견 시나리오를 보고했다.
“기자회견은 1시간 생중계로 진행하겠습니다. 대통령님 말씀은 30분, 나머지 30분은 기자들과 질의응답으로 하겠습니다. 질문은 친여 성향의 언론사 위주로 5명만 하겠습니다. 사전 질문을 먼저 받아 대통령님 답변까지 준비하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질문 당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각본에 짜인 기자회견은 이틀 뒤 대통령실 브리핑실에서 열렸다. 회견은 대통령실이 기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대통령은 대국민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모쪼록 이번 일로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스럽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은 한일 양국의 우호 협력을 무너뜨리려는 세력의 심각한 국기 문란 행위입니다. 또한 국가 안보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반(反)정부 시위 행위로써 결단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에 정부는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이번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사를 통해 밝혀진 주동자들과 그 배후세력에는 강력한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조처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조사 결과를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도난당한 청자 입수 경위와 국정원이 수사를 전담한 배경 등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걸 따져 물으려던 기자들이 손을 들었지만, 대통령과 홍보수석은 사전 정해놓은 기자들에게만 질문권을 줬다. ‘짜고 친 고스톱’은 대통령실에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줬다. 야당은 언론을 이용한 ‘물타기’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이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공세만 취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 여당에 발목 잡기로 비칠 수 있는 데다, 야당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될 개연성도 농후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정치적 수세로 몰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러나 한번 칼을 빼든 야당은 홍당무라도 베야 했다.
결과적으로 여야는 특검에 합의했다. 하지만 특검은 여야가 각각 추천한 인사 중 1명을 대통령이 지명할 수 있었다. 여야는 특검 인사 추천을 두고 줄다리를 거듭했지만, 끝내 무산됐다. 여론을 잠재운 대통령실은 범인 색출과 청자 입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동시에 해당 사건을 보도한 두 언론사를 상대로 허위보도 혐의로 고발했다. 언론사는 수세에 몰렸고,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대통령실 출입을 제지당한 한겨레와 조선일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겨레는 언젠가 인상 깊게 본 영화의 한 대사가 떠올랐다. “헌법 제정자들이 언론의 자유를 준 것은 꼭 가져야 할 보호장치이며, 민주주의에 필수적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다. 언론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통치자를 위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