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욕의 밤
담양 댁은 새벽녘 설핏 잠에서 깼다. 옆에서 잠들었던 순자가 보이지 않았다. 오줌을 누러 갔겠거니 하며 도로 잠을 청했다. 순자는 동이 틀 무렵 돌아왔다. 옷고름을 한껏 감싸 쥐고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운 듯 도둑고양이마냥 눈치를 살피며 살그머니. 그러곤 강진 댁 옆에 가 누웠다. 그녀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인기척에 다시 깬 강진 댁이 순자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녀는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야야, 자다 말고 워째 질질 짜고 그런다냐?”
담양 댁은 작은 목소리로 순자의 어깨를 감쌌다. 순자는 울면서 몸을 떨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음을 눈치챈 강진 댁이 벌떡 일어나 순자를 일으켜 세웠다. 순자의 옷고름과 치마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눈가에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피멍이 들었다. 입술도 터졌다.
“말해 보그라, 이게 어찌 된 거이냐?”
“암것도 아닝게 주무이소.”
“암것도 아니라꼬? 워딜 갔다 왔길래 이 꼬라지를 하고 왔냔 말이여.”
순자는 담양 댁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댔다.
“아무 일도 읎응게 지발 모른 척 좀 하랑게요.”
순자는 채 마르지 않은 눈시울을 훔치며 강진 댁을 안심시켰다. 그러더니 거적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담양 댁은 순자의 몰골을 보고 섬찟함을 느꼈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필시 무슨 일이 있었던게야.’ 담양 댁은 어깨너머 돌아누운 순자를 근심 어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순자는 입을 꾹 닫고 자는 척했다.
날이 밝았다. 옆 방에서 잠에서 깬 남자들이 부스스 일어나 하나둘 굴 밖으로 나갔다. 해변에 나가 세수하고, 밥을 먹은 다음 노역을 나갈 참이었다. 동영도 그들 틈에 끼어 따라 나갔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모래밭은 한껏 젖어있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젖은 모래 소리가 났다. 바닷물에 대충 얼굴을 쓱쓱 닦고 돌아오던 그에게 담양 댁이 조용히 손짓하는 게 보였다. 동영은 희끄무레한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봤다. 담양 댁은 연신 자기 쪽으로 오라는 시늉을 했다. 동영은 젖은 모래밭을 저벅저벅 걸어 담양 댁이 손짓하는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동굴 뒤편 작은 나무숲으로 들어갔다.
“아줌씨, 아침부터 먼 얘기를 하려고 불러 쌌소.”
“동영아, 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으래이.”
“무슨 얘긴데 그라요? 밤새 누가 벼락이라도 처맞았답니까?”
동영이 담양 댁의 부은 얼굴을 보며 퉁퉁거렸다.
“글씨, 그런 거 같다. 순자가 날벼락을 맞아부렀다.”
동영은 ‘순자’라는 말에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순자? 순자가 왜유?”
“글씨, 언 놈한테 당한 것 같다.”
“언 놈한테 당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래유? 대체 누가?”
“잘은 몰러도 일본 군 아니긌나. 워디 조선인이 같은 조선인을 겁탈하겠냐?”
동영은 ‘겁탈’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했다.
“도대체 어떤 놈의 새끼가 그런 몹쓸 짓을..”
동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분노를 삭였다. 담양 댁은 동영에게 조용히 조선인 남자들을 살펴보라고 일렀다. 혹시라도 순자를 겁탈한 게 조선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동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명씩 차례로 전날 밤 행적을 파악했다. 은밀하게.
동영이 사흘 동안 파악한 결과, 순자를 겁탈한 용의자 가운데 조선인은 없었다. 남자들이 머무는 거처에서 사건 당일 수상한 움직임을 한 자는 포착되지 않았다. 동영은 내심 안도했다. 설령 순자를 범한 이가 조선인이었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이 아니라면, 일본군밖에 없다. 누구란 말인가, 대체 누가 순자를..’
동영은 깨어있는 내내 순자에게 몹쓸 짓을 한 자가 누구인지 머릿속에 그려봤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버러지 같은 놈, 천벌을 받을 놈!”
담양 댁도 틈만 나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순자는 담양 댁의 욕지거리를 못 들은체했다. 들은 척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범한 자가 누구인지. 사납게 달려들어 거칠게 벗기고, 벗긴 몸 위에서 헐떡이며 거친 숨을 내쉬는 놈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다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알려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란 두려움과 살아서 조선에 돌아가더라도 환향녀 취급을 받으며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끔찍함이 온몸을 휘감고 돌았다. 오다가다 놈과 마주쳤을 때, 순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놈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땅에 시선을 박은 채 도망치듯 피했다. 놈은 그런 순자의 뒷모습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두 사람만 아는 그날의 사건은 그렇게 잊혀가는 듯했다. 사단이 일어난 건,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이토가 빨래를 하고 있던 순자를 다짜고짜 끌고 갔다. 순자와 함께 빨래를 하던 아낙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누구 하나 대들거나 말리지 못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담양 댁이 돌아왔을 때, 순자는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채 동굴 한쪽에 쓰러져 있었다.
“워매, 이게 워찌된 일이랴? 순자야, 이게 먼 일이라냐?”
순자는 누운 채 아무 말 없이 눈물만 흘렸다. 담양 댁은 순간, 순자를 범한 자가 이토일 거라고 확신했다.
“이토냐? 너를 그렇게 만든 놈이?”
담양 댁이 순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캐물었지만, 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점 잃은 두 눈과 부어오른 눈두덩이를 담양 댁 가슴에 묻은 채.
피가 거꾸로 솟은 담양 댁이 씩씩거리며 부엌으로 가 식칼을 들고 나왔다.
“내 이놈의 모가지를 따 버릴랑게. 오늘 나 죽고 너 죽고 다 뒤지는 거다.”
담양 댁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이토를 찾아가 죽이겠다는 듯 눈이 돌아갔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순자는 벌떡 일어나 담양 댁을 붙들었다. 손에 쥔 칼을 겨우 빼앗아 반대편으로 던졌다.
“아줌씨, 그러지 마소. 그럼 진짜 우린 다 죽어유.”
순자는 무릎을 꿇고 담양 댁 팔을 붙잡고 애걸했다. 그렇게도 울고도 눈물이 아직 남았는지 순자는 흐느꼈고, 담양 댁은 순자를 끌어안고 주저앉았다.
“순자야. 미안허다. 널 지켜주지 못혀서 참말 미안하다.”
담양 댁과 순자의 행동을 지켜보던 아낙들도 눈물을 훔쳤다. 그들 역시 언제 어떻게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기 때문에. 이름도 모르는 섬에 끌려와 굶주림에 허덕이며 파리목숨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설움에 뜨거운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