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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06화

밀리환초

거미줄

by 류재민

밀리환초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비행장 활주로 공사에만 투입된 건 아니었다. 탄약고와 격납고, 지하호 등 군사시설을 짓는데도 동원됐다. 대부분은 일본군이 정해준 곳에서 일했는데, 개중에 일머리가 없는 사람들은 돌과 바위를 나르는 단순노동에 투입됐다. 동영은 주로 활주로 공사에 투입됐는데, 이따금 격납고 구축 현장에서도 불려 갔다. 일본군은 동영처럼 비교적 젊고 건장한 이들을 다용도로 부렸다. 동영은 지치고 고된 작업장에서 쓰러질 것 같은 순간이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자기보다 늙고 병든 이들을 바라보며 이를 악다물었다.

자신이 쓰러지면 그들이 대신 일 해야 하고, 그러면 얼마 못 버티고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동영이 순팔과 함께 격납고에서 활주로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이토는 두 사람을 향해 손짓해 불렀다. 둘은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흙먼지가 가볍게 날렸다.

“오늘까지 남단 공사를 마쳐야 한다. 할 수 있겠나?”

“오늘까지요?”

순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토를 향해 반문했다. 이토는 못마땅하듯이 물끄러미 활주로 북단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찌푸릴 때마다 그의 얼굴 곳곳에 새겨진 흉이 짙어졌다.

“남단에는 돌멩이만 더 채우면 되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너희라면 저녁 먹기 전까지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토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말했지만, 동영과 순팔은 확답하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왜 대답이 없는 거야. 명령을 어기면 밥은 없다. 밤을 새워라도 끝내라, 알겠나?”

이토의 엄포에 두 사람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곤 활주로 남단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토의 모습이 멀어지자 순팔이 볼멘소리를 냈다.

“이런 육시랄. 우리가 무슨 지 병사도 아니고, 어디서 명령질이야!”

“아휴, 아재. 목소리 낮추소. 들리겄소.”

“쳇, 들으면 들으라지. 한나도 안 무섭다.”

동영은 객기를 부리려는 순팔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다 끌리가믄 아재만 손해유. 잠자코 가쇼잉.”

동영의 간절한 눈빛에 순팔은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은지까지 이래 살아야할랑가 모르겄다.”

순팔의 한숨 섞인 하소연에 동영은 말없이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어느새 활주로 남단에 다다른 둘은 커다란 바위부터 나르기 시작했다. 동영과 순팔은 제법 무거운 돌을 양쪽에서 들어 날랐다. 태양은 작열했고, 박박 깎은 두 사람의 머리에선 땀이 뚝뚝 떨어졌다. 힘을 줄 때마다 깡마른 몸에 갈비뼈가 툭 튀어나왔고, 팔뚝의 힘줄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돌멩이가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남은 구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노역은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돌을 들고 던질 때마다 나오는 짧은 신음만 간간이 허공에서 부서질 뿐.


동영과 순팔이 노동을 마쳤을 때는 이미 저녁놀이 진 뒤였다. 두 사람은 맨 마지막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어둑해진 산기슭을 내려오던 순간 숲속에서 단말마가 들렸다. 그 소리는 가느다랗고 짧아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둔한 순팔은 듣지 못했지만, 신경이 예민한 동영의 귀에는 선명히 들렸다.

“아재. 지금 이게 뭔 소리요?”

“소리라니? 그게 먼 소리여? 내 귓구녕에는 암것두 안 들리는디.”

“쪼매 전에 저짝서 여자 비명소리 같은 게 들렸잖소?”

“뭐시기? 여자 비맹소리? 글씨, 난 새 소리 하나 못 들었다.”

순팔이 동영이 손으로 가리키는 숲속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필시, 뭔 가스나 소리가 들린 거 같은디.”

“이눔아, 늬가 인저 장가들제가 되얐나 보다. 가스나를 찾는 걸 보니.”

“아이, 참. 아재도. 그런 게 아니라 말이오. 분명히 저그서….”

동영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하던 순간, 숲속에서 검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가 아닌, 남자였고, 그는 바로 사카이 대좌였다. 바지춤을 올리며 나오다 두 남자와 마주친 사카이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금세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딴지를 걸었다.

“일이 끝났으면 빨리 내려갈 것이지,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게냐?”

“죄..죄송합니다, 대좌님. 다름이 아니옵고, 대좌께서 나오신 쪽에서 여자 비맹이 들렸다고 해서 잠깐 둘러보던 중이었습니다요.”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그쪽에서 나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서 내려가라. 늦으면 저녁밥은 없는 줄 알아.”

“하이!”

동영과 순팔은 저녁밥이 없을 줄 알라는 불호령에 두려움에 떨며 산 아래로 달음박질했다. 온종일 지친 몸을 회복하려면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동영은 숨을 헐떡이며 뛰어가면서도 머릿속에선 누군지 모를 여자의 비명 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사카이는 두 사람이 산허리를 휘돌아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있었다. 두 사람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이 들었을 즈음,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왔다. 사카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이 들었을 때,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나뭇가지가 발걸음에 두둑,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그 검고 어두운 숲속에서 한 여인이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은 동영이 들었을 비명 소리의 주인공이 분명했으리라. 여인은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 산에서 내려왔다. 누구의 눈에 띌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비탈길을 지나 동굴로 돌아왔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리 속에 끼어 일찌감치 잠을 청할 심산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누웠을 때, 말간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인은 누운 채 가만히 눈을 떴다. 동굴 천장에 거미줄이 잔뜩 얽혀 있었다. 그녀는 곳곳에 처진 거미줄과 거미줄에 걸려 꼼짝 못 하는 벌레 한마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너는 어찌하여 거미줄에 걸린 신세가 되었느냐.’

여인의 눈에서는 다시금 눈물이 솟아올랐지만, 여인은 훔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었다. 밀리환초에 또 하룻밤이 내렸다.


담양 댁은 순자를 해코지한 게 이토라고 확신했다. 타향살이에 지치고, 노동에 시달린다고 해도 순자를 건드릴 만한 조선인은 없었다. 나라는 잃었지만 ‘조선인’이라는 한 핏줄이기에. 그러면 범인은 일본군일 텐데, 그만한 일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정도면, 평범한 군속은 아니었다. 적어도 소좌 이상의 간부급이어야 하고, 그중 성질이 괴팍하고 인상도 험상궂은 건 이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담양 댁은 순자와 둘이 있을 때마다 몹쓸 짓을 저지른 게 이토냐고 물었지만, 순자는 번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그때마다 담양 댁은 속이 터질 만큼 답답했지만, 같은 여자로서 순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남았기에 그저 애처롭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순자가 또다시 해를 입지 않을까 혼자 있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다짐만 할 뿐. 하지만 순자의 고통은 담양 댁이 모르는 사이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그 상처는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났다. 미역과 굴, 따개비 등 해조류를 넣고 끓인 국을 먹던 순자가 구역질을 해댔다. 두어 번 그러다 말겠지, 했건만 연거푸 계속됐다. 급기야 순자는 입을 틀어막고 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담양 댁이 곧장 순자를 뒤따라 나갔다.

“순자야, 괜찮으냐? 밥 먹다 말고 우짠 일이여?”

“아츰부터 비린 걸 먹어서 그른가, 울렁거리고 메스꺼운 게 속이 영 불편하고만요.”

담양 댁은 순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얼굴은 파리하니 창백하고, 눈은 퀭한 것이 분명 입덧 증상이었다. 순자는 여전히 허공에 대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아를 뱃구나!”

담양 댁의 말에 순자는 기겁했다.

“아줌씨, 고게 뭔 말이요? 아를 배다니?”

“니 지금 하는 꼴이 영락없는 임신이랑게.”

“에이, 식전부터 무신 끔찍한 소리를 그래 하요. 그런 소리 마소. 누가 들을랑가 겁나네.”

“아니다. 딴 사람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인다. 아가 들어선 것이다.”

담양 댁의 확신에 찬 말에 순자는 대꾸하지 못했다. 가만히 따져보니 매달 찾아오는 달걸이를 한 날이 열흘도 더 지났다. 순자는 공포와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솟구쳤다. 순자의 눈동자에 담뿍 고인 눈물을 본 담양 댁이 조용히 순자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손목을 틀어쥐고 일어섰다. 순자는 순순히 담양 댁 손에 이끌려 동굴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자야, 니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똑똑히 답하그라. 안 그럼 너도, 니 뱃속에 있는 아도 온전치 못할 거다.”

순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이토 소좌냐?”

담양 댁 물음에 순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참말이냐? 이토가 아니냐?”

순자는 이번에도 완강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누구여? 널 이래 만든 게 대체 언 놈이냐고?”

순자의 눈에 참았던 눈물을 후드득 쏟았다. 이윽고 모든 걸 포기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저를..이렇게 만든 건..아 애비는...”

담양 댁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는 순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순자는 담양 댁 품에 안겼다. 엄마 품처럼 따스했다. 그래서 더 섪게 울었다.

“괜찮다, 순자야. 내 니 심정 으쩐징 다 안다. 괜찮으니 나 한테만 다 말해 보그라.”

흐느끼던 순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엄마같은 담양 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으로 순자의 눈물을 훔쳐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카이...사카이 대좌요.”

“뭣이? 사카이라고? 아니 어떻게 그자가?”

“내도 참말 모르겄소. 우짜다 내가 그자한티 그래 됐는가.”

담양 댁은 순자를 일으켜 자신의 옆에 앉혔다. 그리고 순자는 잠시 긴 한숨을 쉬더니 자신이 겪은 저간의 사정을 넋두리하듯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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