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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07화

밀리환초

검은 그림자

by 류재민

그날 밤, 순자는 묘한 꿈을 꿨다. 그녀의 꿈속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동무들과 무등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던 길이었다. 수박밭을 지나고 있었는데, 밭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순자와 동무들을 향해 손짓하며 불러 세웠다.

“이리 오니라. 들어와 수박 한 통 묵고 가거라.”

한여름 더위에 목이 마르던 참에 순자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일등으로 갈랑게, 니들은 알아서 따라 오그라.”

순자가 갑자기 밭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순자의 달음박질에 당황한 동무들도 뒤따라 뛰기 시작했다. 순자는 울타리로 친 풀숲을 헤치고 도랑을 넘어 수박밭으로 들어갔다. 어른 머리통보다 두 세배 큰 진초록 수박들이 잎과 줄기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순자는 줄기를 밟지 않고 조심조심 다니면서 어떤 수박이 잘 익었는가 두드렸다. 수박마다 통통거리며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암거나 따도 된다. 다 익었응게.”

순자는 그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밭 이곳저곳을 다니며 먹을 수박을 찾았다. 그때였다.

“아얏!”

순자가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순자의 비명을 들은 동무들과 할머니가 황급히 뛰어왔다. 순자의 발목에 피가 흘렀고, 그 옆으로 뱀 한 마리가 S자 곡선을 그리며 풀숲으로 자취를 감추고 숨었다. 할머니는 작대기를 들고 풀숲을 헤쳤다. 구렁이처럼 생긴 갈색 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저거 독사 아닌가베.”

할머니는 재빨리 순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상처에 입을 갖다 대고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순자는 뱀에 물린 고통보다 ‘독사’라는 말에 더 놀라 울부짖었다.

“오메, 수박 한 입 먹으러 왔다가 죽는갑네. 엄니, 아부지 어쩐다요. 나 죽는갑소.”

따라왔던 동무들은 혼비백산해 수박밭을 뛰쳐나갔다. 평온했던 수박밭이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순자는 몇 번이나 까무러치다 잠에서 깼다. 온몸에 땀이 찼고, 옷은 흠뻑 젖어있었다. 악몽에서 깬 순자는 일어나 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먼 이런 꿈이 다 있당가. 참마로 죽는 줄 알았네.”

순자는 일어난 김에 오줌을 누러 굴 밖으로 나왔다. 사위는 캄캄했다. 볼일을 마친 순자가 옷매무새를 고치며 간이 변소에서 나왔다. 다시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순자는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밤바다는 고요했고, 파도는 잔잔했다. 하늘의 별은 유독 환히 반짝였다. 순자는 문득 고향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두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는데, 순자는 금방 닦아 내렸다.

“버티는겨. 어쩌든 참고 버티믄 꼭 엄니 아부지 보러가는 날이 오지 않겄어.”

순자는 다짐했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는 날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견뎌내겠다고. 기필코 살아내겠다고. 밤바다를 거닐다 동굴로 발길을 돌렸을 때, 순자 앞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두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거기, 누구요?”

순자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그때였다.

“퍽!”

“으악!”

순자는 검은 그림자가 내리친 둔기에 맞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정체 모를 그림자는 정신을 잃은 순자를 들쳐 멨다. 그리곤 동굴 안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순자는 한참이 지나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있던 곳은 사카이 대좌 방이었다. 순자의 옷을 이리저리 찢겨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상태였다. 사카이는 방 입구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순자는 사카이를 향해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등을 돌리고 있던 사카이는 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건 알 필요 없다. 일어났으면 그만 네 방으로 돌아가.”

사카이의 목소리는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순자는 사카이가 자신을 범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바닷가에서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기절한 것만 생각났다. 순자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혹여 딴 사람 눈에 띌까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며 돌아왔다. 돌아와 자리에 누운 순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강진 댁이 꼬치꼬치 물어봤지만, 순자는 함부로 입을 놀리기 싫었다. 만에 하나 소문이 퍼지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믿었기에. 순자는 그날 이후 사카이만 보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되도록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사카이의 검은 그림자는 자주 순자 앞에 드리웠다. 순자는 사카이에 이끌려 숲속이든, 그의 방에서든 자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때마다 목을 매든, 절벽에서 떨어지든, 바다에 몸을 던지든 죽고 싶었지만, 순자는 참았다. 고향에 가야 했다. 가서 부모님을 만나려면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했다.


순자의 이야기를 들은 담양 댁은 억장이 미어지는 듯했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순자의 배가 불러오면 임신한 사실을 감추거나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만에 하나 소문이 번지면 순자한테 이로울 게 없었기에. 담양 댁은 아무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순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답답함과 분노가 몰려드는 건 참기 어려웠다.

그로부터 달포가 지났을 무렵, 순자에게 이상한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며 떠들지 않나 자주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젊은 것이 지대로 먹질 못헝께 허깨비가 보이는 모양인갑다.”

그때마다 담양 댁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감쌌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자의 달라진 행동에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암암리에 순자가 미쳤다, 는 돌 정도였다. 그때마다 담양 댁은 펄쩍 뛰었다.

“언 놈의 아가린지 몰라도 구린내 나는 주둥이네 그랴. 그놈의 주둥아리 한 번 나한테 걸려보래이. 콱 찢어불랑게!”

담양 댁 엄포에도 동굴 안팎에선 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회의적으로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의 이상행동이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다. 하루는 귓가에 흰 꽃을 꽂은 순자가 활주로 공사장 근처에 나타났다. 순자는 발밑에서 돌멩이 몇 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일본 군속들 사이로 냅다 던졌다. 노역 중이던 조선인들은 그 모습에 식겁했다. 순자가 던진 돌멩이는 일본 군속 옆을 피해 날아갔고, 다행히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놀란 동영이 허겁지겁 뛰어가 순자를 말렸다.

“순자야, 여긴 왜 와서 그러냐?”

“나도 일 도와주러 왔구만 우째 그러는데?”

동영의 제지에 순자는 꽥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총을 멘 일본 군속이 고개를 돌렸다. 동영은 재빨리 순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일본군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순자의 귓가에 꽂힌 꽃을 가리켰다.

“저런 미친년이!”

군속이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오려 하자 동영은 고개를 몇 번이고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어디 대일본제국 승리의 길목에 재를 뿌리고 있느냐. 당장 데리고 꺼져!”

동영은 순자의 손목을 낚아채고 노역장을 빠져나왔다. 순자는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악다구니를 썼다.

“대일본제국 만세! 조선도 만세! 천순자도 만세!”

동영은 말없이 순자의 손을 잡고 산길을 내려왔다. 동굴 앞에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을 발견한 담양 댁이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왔다.

“워디 갔나 한참 찼았는디, 산엔 뭐 찾아 먹겄다고 겨 올라갔다냐?”

“소리소문없이 올라와서 깜짝 놀랐구먼요.”

“별고는 없었고?”

“일본군한티 돌팔매질을 했는디 눈치는 못 챘고, 먼 사단이 날 거 같어 얼릉 데리고 왔소.”

담양 댁의 채근에도 순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만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으이구. 이 화상아. 우짤라고 그런 짓을 했냐잉? 내가 니 땜에 내 명에 못 죽지 싶다.”

담양 댁에게 순자를 인계한 동영은 다시 노역장으로 향했다.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는 순자를 볼 때마다 동영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든 건, 순자를 그렇게 만든 게 누군지 알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설령 그게 누군지 알아내더라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거였다. 총을 가진 일본군에게 빈손으로 대항하기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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