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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08화

밀리환초

망상

by 류재민

순자의 배는 갈수록 불러왔다. 하지만 식량 부족으로 먹질 못하니 영양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순자의 정신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다. 아무한테나 달려들었다. 품에 안아 달라고도 했다가, 멱살을 잡기도 했다가, 주저앉아 넋두리하기도 했다가, 청승맞게 울기도 했다가, 허공을 향해 웃기도 했다가, 아무 데서나 잠을 자고, 오줌을 눴다. 사람들은 그녀를 딱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들도 주린 배를 부여잡아야 했고, 강제로 노역장에 가야 했고, 한눈을 팔았다간 매를 맞거나 배식에서 제외됐기에. 저마다 코가 석 자다 보니 정신줄을 놓은 순자를 챙길 만한 여유도, 인정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안쓰럽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릴 따름이었다. 담양 댁만이 순자를 살뜰히 챙겼다. 담양 댁은 순자의 산달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배식으로 나온 미역을 몰래 숨겨두고 말렸다.

‘먹을 것도 없는 디서 이런 거라도 먹어야 젖이라도 물릴 거 아닌감.’

담양 댁은 순자가 지난번처럼 일본군에게 해코지하다 몸이 상하지 않을까 늘 불안했다. 순자는 담양 댁의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만 뜨면 활주로 공사장과 격납고 건설 현장을 찾았다. 두 곳에선 이토와 사카이가 교대로 현장을 지휘했다. 순자는 사카이가 활주로 공사장에 있으면 격납고 방향으로, 격납고 현장에 있으면 활주로로 동선을 이동했다. 사카이와는 본능적으로 피했다. 그녀의 뱃속에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게 만든 이가 그였지만, 순자는 철저히 사카이를 외면했다. 아니, 어쩌면 아이를 지키겠다는 모성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태는 나날이 악화했다.

하루는 순자가 바닷가 근처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물웅덩이에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보였다. 순자는 물고기 떼를 한참 뚫어지게 봤다. 그러다 두 손으로 물고기를 건져 올려 입에 털어넣었다. 웅덩이 속 짠 바닷물도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입 속에 들어온 물고기를 우물우물 씹어댔다. 오도독 씹히는 식감이 나쁘지 않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퉤, 하고 뱉었다. 입속에서 뭉그러진 물고기 내장과 가시와 살점이 어지럽게 바닥에 떨어졌다. 순자의 입술에선 침과 피가 섞여 흘렀다. 혀를 깨문 모양이었다. 순자는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괴성을 지르며 모래사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실성한 여자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쯧쯧, 혀를 찼고, 일본군 두 명이 그녀에게 다가가 총으로 위협했다. 동영과 담양 댁이 부리나케 달려가 순자를 잡아끌었다. 순자는 동영과 담양 댁에 끌려가면서 자신을 위협한 두 일본군을 향해 침을 뱉었고, 히죽거리며 혀를 쑥 내밀어 놀렸다. 동영과 담양 댁은 더한 일이 생길까 두려워 서둘러 순자를 동굴 방에 데려가 눕혔다. 순자는 동굴에서도 한동안 비명 섞인 괴성을 지르다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 그러곤 코를 골며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잠든 순자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때로는 평온한 표정을 짓다가, 때로는 찡그린 표정을 짓다가, 때로는 웃는 표정을 짓다가, 때로는 끙끙거리다가, 간간이 잠꼬대도 했다. 그렇게 끼니도 거른 채 저녁나절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담양 댁은 물에 적신 천을 가져다 순자가 흘리는 식은땀을 닦아 줬다. 그러다 잠에 취해 일어날 줄 모르는 순자를 내려다보며 혼잣말했다.

“몸이 성해도 아를 잘 낳을랑가 모르는디, 이리 기력이 없이 우짤라고 그려. 이것아. 이 불쌍한 것아.”


“으윽..아악..”

산통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조산이었다. 담양 댁은 뭐가 급해 일찍 나오려고 그러냐며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순자는 진통이 올 때마다 동굴이 떠내려가라 비명을 질렀다. 머리부터 흘러내린 땀은 온몸을 적셨고, 머리카락은 고통에 진저리 쳐 잔뜩 헝클어졌다. 담양 댁은 아낙 둘과 함께 더운물을 가져다 출산 준비를 했다.

“맴 단디 묵어야 한다. 안 그럼 너도 아도 다 잘못돼뿐게.”

담양 댁은 순자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지만, 출산 경험이 없는 순자는 좀처럼 힘을 주지 못한 채 비명만 내지르고 있었다.

워매, 나 죽겄소. 으아악.”

순자의 눈에선 눈물이 솟구쳤다. 흐르는 땀과 눈물이 한데 섞여 옷가지를 만든 베개가 흠뻑 젖었다.

“안직도 멀었다. 더 힘을 줘봐라, 순자야.”

담양 댁은 순자의 배를 누르며 용기를 북돋웠다. 어스름 새벽 시작한 진통은 정오를 지나 저녁놀이 질 때까지 이어졌다. 순자는 기진했고, 담양 댁을 비롯한 산파들도 지쳐갔다.

“아짐씨? 순자가 멕아리가 한나도 없는디, 이러다 둘 다 잘못돼 뿌면 우짜요?”

아낙 하나가 걱정스럽게 담양 댁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명이 질면 둘 다 살 것이고, 안 그람 둘 다 죽지 않겄나. 목심은 하늘에 달렸다고 항게 천지신명이 알아서 하겄제.”

담양 댁은 덤덤하게 답했지만, 속으론 산모와 아이 둘 다 잃으면 어쩌나 애가 탔다. 날이 지고 어둠이 왔을 때, 순자는 몸을 풀었다. 동굴 안에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담양 댁은 달궈진 가위로 아이 탯줄을 잘랐고, 순자는 아이를 볼 겨를도 없이 기절했다. 꼬박 하루가 걸렸다. 순자는 새벽녘 눈을 떴다. 아이는 젖을 문 채 잠들어 있었다. 순자의 기척에 발목 아래서 곯아떨어졌던 담양 댁이 잠에서 깼다.

“계집애가 널 닮아서 아주 곱다.”

순자는 누운 채로 고개를 살짝 돌려 젖무덤에 엎드려 쌔근거리며 잠든 아이를 내려보았다.

“우리 순자, 심 들었지? 고생혔다. 니는 인저 어미가 됐어야.”

순자는 담양 댁 입에서 튀어나온 ‘어미’라는 단어가 자신의 품에서 잠든 아이처럼 낯설게 들렸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는지,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볼도 살짝 꼬집었다. 자다 깬 아이가 부르르 떨며 울어 젖혔다. 순자는 재빨리 아이에게 젖을 물려 울음을 멎게 했다. “아가, 엄니다. 니 어미다. 인저 괜찮다.”

순자와 아이를 번갈아 보던 담양 댁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출산을 계기로 순자의 정신도 온전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날은 깊었고, 동굴 안은 잠잠해졌다. 이따금 코 고는 소리와 잠꼬대만 들렸을 뿐, 적막한 공기가 맴돌았다. 순자도, 아이도, 담양 댁도, 출산을 도운 산파 아낙들도 모두 잠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밀리환초에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함께 또 하루의 여명이 해수면을 타고 서서히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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