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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타 Nov 29. 2022

지그재그와 빗금

9화

며칠 뒤 지그재그가 자정 무렵 집으로 왔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눅눅하고 냄새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온 후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지그재그로부터 택시를 타고 가니까 금방 도착할 거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현관문을 열어 주자 그에게선 숯불 돼지구이 냄새와 소주 냄새가 났다. 왼쪽 볼이 조금 부풀어 있고 입가에 피가 살짝 묻어 있었다. 입 안쪽 어딘가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내가 입가에 피가 묻었다고 하자 그는 혹시나 하고 혀끝으로 치아를 드르륵 훑어보았다. 다행히 이빨이 부러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그는 한사코 가지 않겠다며 약간 찢어진 것뿐이니 조금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고집했다. 화장실에 가서 한참 동안 피를 뱉어 내고 물로 으그르르 헹구더니 그는 씨익 웃으며 나왔다. 팝콘을 만들려고 싱크대 위에 내놓은 옥수수 알갱이들을 보더니 지그재그가 크하하 웃었다. 그러더니 옥수수 한 움큼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어찌나 딱딱한지 수십 개의 누런 이빨들을 혓바닥에 올리고 있는 기분이야. 그가 다시 웃었다. 웃음의 색깔이 누랬다.

 

‘옥수수 알갱이 같은 사람들. 별 볼일 없으면서 괜히 딱딱한 사람들. 언제나 누런 이빨을 딱딱 부딪치지. 돼지도 소도 사람도 먹는 옥수수. 어디에나 널려 있고 아무 데나 쓰이는 사람들. 우리의 뱃속 질량, 우리의 산더미 같은 부피. 어디에나 아무데나, 지그재그!’ 지그재그는 좁은 방을 지그재그로 걸으며 팔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 말해 줘도 돼? 나도 그의 이상한 어법으로 물었다. 힙합 밴드 그루브가 해체됐다고 했다. 그동안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이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여러 번 들었으므로 무척 놀랐다. 내년엔 소극장에서 공연도 할 예정이었고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머지않아 음반도 내고 인정도 받을 거라고 지그재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형이 가장 먼저 그만둔다는 말을 꺼냈다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임신을 해서 결혼을 해야 한다고. 그러자 드럼 치는 후배도 늘 미안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 자신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는 이제 지쳤다고만 말했다. 지그재그는 한 사람 한사람 따로 만나고 술을 마시며 설득하고 애원하고 화를 냈다고 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밴드의 해체를 현실로 받아들인 일렉트릭기타가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다. 서로 맺힌 게 있다면 풀자는 의미였다. 마지막 술자리가 될지도 몰랐으므로 처음엔 조심스럽게 말이 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잔이 몇 잔 돌자 서로의 아픈 곳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상대를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지그재그는 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대들에겐 음악이 취미였어’라고 세 번이나 말한 것이다. 

  

항시 5분 대기조 래퍼가 둔중한 베이스음을 때려눕혔어. 래퍼의 이빨 사이로 붉은 속사포가 터져 나오고 항시 대기조가 일렉트릭기타에게 두들겨 맞았지. …… 그동안 문제는 늘 많았어. 어떻게든 봉합하고 몇 년을 끌어왔을 뿐이지. 결국 돈이 문제야. 음악의 맞은편에 생활이 딱 버티고 있는 거야. 모두들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 그리고 그 한마디면 더 이상의 말은 사족이 돼버려. 먹고 사는 것이 승리하잖아. 일렉트릭은 누구도 누구를 욕하지 못한다고 하더군. 그런데 왜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는 걸까. 대단한 것도 아닌 데 말이야.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결국 사는 데 지는 걸까. 산다는 일은 진다는 일일까.  


내가 알 리 없었다. 지그재그는 내버려두면 밤새도록 말을 할 것 같았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나를 안았다. 그의 혀끝에선 피 맛이 났다. 눈을 감고 손끝으로 만져본 그의 피부 감촉은 매끈했다. 나는 지그재그의 몸에 털이 많지 않은 게 좋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말끔함에 끌리는 모양이었다. 서로의 살갗을 만지고 비비면서 나는 그가 새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딱딱한 껍질을 까주고 살랑살랑 흔들어 씻겨 주고 기분이 내키면 냄새를 맡아 줄 수도 있게. 정말이지 이제 그는 나에게 지그재그가 될지도 몰랐다. 그가 말했다. 네 몸에서 바다 냄새가 나. 그는 살갗에 코를 대고 냄새를 흠흠 맡았다. 음, 냄새 좋아. 씻었는데도 몸에서 해산물 냄새가 난다니 조금 부끄러웠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은 지그재그는 없고, 없으며, 없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도 없었다. 지그재그가 배고프다고 한다. 나는 한밤중에 그저 묵묵히 밥을 짓는다.  그도 묵언수행자처럼 말없이 밥을 먹는다, 한밤중에. 빗살무늬토기에 담긴 보얀 밥은 한 숟가락씩 비어 간다. 이따금 젓가락으로 소시지와 멸치를 집는다. 소시지 같은 세상이야. 멸치 같은 세상이야. 그는 오물오물 소시지와 멸치를 씹으며 중얼거린다. 소시지와 멸치가 한 입에 섞인 것 같은 세상일걸. 내가 말하고 그가 엷게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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