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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립 Nov 20. 2020

내가 배운 도덕 교과서는 시대 착오적이었다.

아주 사소하고 불편한 문제가 세상을 바꾼다.

학창 시절, 도덕 교과서에는 가족 관계도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난 어렸을 때 그 부분이 너무 싫었다. 항상 ‘아빠, 엄마, 아들’로 되어있고, 아빠와 엄마는 첫째였기 때문이다. 난 그래서 내 가족 형태에 맞게 교과서에 그림을 그렸다.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렇게 했다.


가족의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왜 그런 부분은 고려하지 못하는 걸까? 아마 그들은 ‘아빠, 엄마, 아들’의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반적’이라는 것은 교과서에 명시되어있지 않고, 그게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아무리 일반적이라도 ‘예시일 뿐이니, 다른 가족의 형태도 있다.’라고 작게 적어놓는 것도 고려하지 못했을까?


물론, 지금은 국정교과서가 아니고 대부분 사설 출판사에서 펴낸 교과서라서 다양한 내용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때는 모든 학생이 똑같은 교과서로 지식을 배웠다.


교과서는 이론적인 지식만 가르쳐줄 뿐, 실생활에서 도움되는 지식은 거의 가르쳐주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과서는 참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을 심게 하는 존재인 것 같다. '교과서'라는 이름으로 아무 결점 없을 것 같이 다가와서 순수하게 그 내용에 속는다. 정작 인생에서 꼭 필요한 부분은 가르쳐주지 않고, 아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는 이름만 '교과서'인 판타지 소설이다.


출처 Unsplash @cdc (사진은 예시입니다.)


“‘아빠, 엄마, 남자아이.’가 뭐 어때서? 예시일 뿐인데 뭐가 문제지?” 할 수도 있다.


작은 예시라도 편부모 가정이나 부모님이 존재하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은 의문을 느낄 수 있다. "왜 우리 집과는 다르지?", "다른 아이들은 다 아빠(엄마)가 있는 건가?"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소외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즉, 그런 아이들은 똑같은 가족 관계도라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 의미를 크게 받아들인다. 또한 아이들에게 교과서에 나오는 가족의 형태를 보여주면 ‘이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이구나.’라고 고정관념이 박힐 수도 있다. 교과서에 나와서 더더욱 그런 인식이 박힌다. 그래서 일부 아이들은 '편부모 가정'이라고 하면 그 가정의 아이를 놀리거나 동정한다.


편부모 가정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건가? 부모가 없다고 해서 그 아이들은 동정을 받아야 하는 건가?



최근에 방송인 사유리 씨가 정자 기증을 통해 임신, 출산을 했다. 일부에서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자라 아이가 받을 고통은 생각도 안 하는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비난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아빠가 없이 자라면 아이가 정말로 고통받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이야 남들 다 있는 아빠가 없으면 아이가 위축될 수도 있다. 그러나 편부모 가정, 부모 없는 가정, 입양 가정, 동성 가정 등등이 점점 많아지면 해당 가정의 아이들은 상처를 받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의문과 동정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가정'이 전부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라는 것을 삶 속에서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외국에서는 동성 가정, 편부모 가정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고 그에 대한 제도도 마련되어있다고 한다.


무조건 외국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유리 씨가 비혼모를 선택했다는 기사와 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인식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무조건 '엄마, 아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되려 한 가정에 엄마와 아빠가 존재해야 한다는 그 사고가 고정관념이고, 편협한 시각이다. 사회가 변화하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으니 시선을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위 예시와 같은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생기기 전에 먼저 도덕 교과서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소개해주면 격변하는 세상을 좀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수학, 과학, 사회 같은 교과서에서는 이런 문제가 크게 다가오진 않는다. 풀어야 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상황이 좀 다르다. '도덕'이라서 뭔가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 같고, 풀어야 하는 문제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수학의 문제 유행이 바뀌는 것처럼, 도덕도 시대 유행과 변화에 따라 빈번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배우는 아이들이 세상과 교과서의 간극을 느끼지 않게 되어 혼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출처 Unsplash @Tyler Nix


"고작 가족 관계도. 그게 뭐라고." 하면서 엄청 작은 문제라고 치부하며 "넌 너무 예민해."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너무 예민한 거 아냐?  인생 진짜 피곤하게 산다."라는 말은 내가 '사소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입장에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난 편하게 살고 있는데? 굳이 바꿀 필요 없는데? 귀찮게 뭐 하러 바꾸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번쯤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이 보인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불편함이라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그 의미는 크게 다가온다. 또한 그 불편함을 하나둘 바꾸면 큰 문제도 바뀐다. 사소한 불편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많은 사회적 제도와 문제들을 바꿔왔는지, 우리나라의 역사가 말해준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Unsplash @feliphe-schiarol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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