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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Dec 30. 2021

상처를 준 사람은 없고, 받은 사람만 있다

작은 것 하나에도 상처받고 움츠러드는 내가 싫을 때가 있다. 누군가 같으면 웃어넘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겠지만, 나는 그게 잘 안되어 더 힘들다. 여기에서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정말 상처를 받기만 했는지 이다. 사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기만 했다는 것. 이상하게도 상처를 받기는 했지만, 상처를 줬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말실수가 상대에게 어떤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면, 그저 경청 하는 것도 필요하다. 대화의 기본이 말하고 듣고 공감하는 것이라면, 관계의 확장 영역에서는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건 필수 사항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듣기만 한다는 게 정말 어렵지 않는가. 자신의 말만 하고, 상대를 이해시키려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욕심인 것 같다.


욕심이 아니더라도, 결국 나를 중심으로 펼쳐놓은 이야기는 상대의 아픔을 더 자극하기도 한다. 아픈 마음은 상처가 있어서 그렇다고. 보듬어야 하는데 압박을 가하면 아픔은 고통이 되지 않을까. 김현수 작가는 책에서 “정신과 의사에게 정작 치료받아야 하는 사람은 안 오고, 그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만 병원에 온다”라고 말했다. 아이러니 하지만. 


정작 정상적인 사람일수록 상처받을 확률은 높다. 내 이야기를 오랫동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기보다는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라고 시작하지만 “하지만”으로 사과의 말을 끝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다는 얘기. 미안한 건 맞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줘라고 하는 그런 뻔뻔한 말이다.


Photo by@paris_shin

    

즉, 사과는 알고 보면 사과가 아니고, 듣는 사람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관계에서 중심은 당연히 내가 되어야 하지만 내가 상처를 안고 있다면, 다른 누군가도 상처를 품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하지만 잘 안 된다.     

아픔과 상처투성이인 사람은 일반적인 특징 하나가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심리상태는, 착하다는 것. 물론 내 생각이 옳음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보통은 그런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을 내어주고 믿음으로 기다리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약삽하고 때 묻은 계산뿐인 경우가 많은데, 한편으로는 마음을 쓴 만큼 기대가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오랫동안 남아 있는 상처다. 많은 사람이 상처를 받지만 유독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은 이제 만성이 되어 버린다. 어머니의 손목이 시리고 저려서 한 번 병원에 간다고 해서 회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는 더 깊숙이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런 고통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지친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게 더 중요한 인생.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내가 경험한 상처를 덜 받기 위한 세 가지가 있다.  

   

1. 너무 많은 걸 해주려고 하지 말자. 특히 마음이 여리거나 착한 사람일수록 이 부분이 어려울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더 해주면 해주었지, 머릿속으로 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없이 해주고 싶은 보호자 본능이 이에 해당한다.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 

    

2. 단호한 거절은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부탁을 들어줄 때는 자신의 한계치를 알고 적어도 감내 가능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마음의 부채도 없는데, 거절하면 왠지 죄지은 듯 하겠지만 지금의 거리를 두는 게 그나마 인간관계를 최소한이나마 유지할 수 있는 길일 수 있다.   

  

3.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지 말자. 우리는 가끔 내가 신경을 쓰고 도와준 사람에게 그만큼의 도움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호의적이고 내 생각만큼 나를 신경 써주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 내가 그 사람에게는 거쳐가는 하나의 징검다리일 뿐 나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착하다는 용어의 정확한 해석을 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본다면 ‘손해’를 껴안고 사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정성을 쏟았지만 알고 보니 상대는 그렇지 않았다거나, 모든 사건의 결말을 내 탓으로만 돌리는 그런 여린 마음이다. 물론 생각은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분명한 공통점 하나는 우리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 이것 하나만이라도 벗어나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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