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군사신이례, 신사군이충(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당신이 임금이라 하여 신하를 종 다루듯 하지 말고 예를 갖추어 대하시오."라는 얘기다.
노나라 정공이 재위중일 때 공자는 관직에 있었다. 정공이 물었다.
“왕이 군사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에 공자가 답하기를
“왕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으로써 군왕을 섬겨야 합니다.”
이 말의 미묘한 부분을 이해하고 싶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즉, 군왕이 충으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예로써 군왕을 섬기면? 예를 들어 어떤 회사의 사장이 직원들에게 “회사가 없으면 일하는 너희들은 다 굶어 죽어!”라고 말하며 회사에 충성하라고 한다면 어떨까? 업무는 자발적으로 돌아가야 효율성이 높아지는데, 강압적으로 충성을 강요하면 직원들은 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직원들은 마지못해 소극적으로 대충 일하며, ‘노동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안일하게 생각할 것이다. 적당한 선에서 직원이 예로써 사장을 대하는 것이다.
반대로 공자가 제시한 “군왕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으로써 군왕을 섬겨야 한다.”는 방법으로 회사를 경영한다면? 사장이 고용한 직원을 예절로써 관리한다면 직원에게 가장 기본적인 사항만 요구하는 것이다. 강압적이지 않은 분위기에서 직원들이 최소한의 규범과 규율을 준수하게 끔만 관리한다면 사장은 직원에게 충성하라고 요구할 상황도 생기지 않게 된다.
“신하는 충으로써 군왕을 섬긴다”는 것은 직원이 회사일을 자기 일처럼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일을 한다면 역량을 발휘하여 최선을 다해 능률이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게 꿈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사장은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직원들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논어의 후속 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군자를 섬기는 건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도로 기쁘게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으며, 사람을 부릴 때는 그릇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 소인은 섬기기는 어려워도 기쁘게 하는 것은 쉽다. 도로 기쁘게 하지 않아도 기뻐하며, 사람을 부릴 때는 완전히 갖추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군자는 섬기는 건 쉬워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는 문장의 예를 들어보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라며 대가성 뇌물을 줬다고 가정하자. 윗사람이 흡족해하며 “세상 물정을 아는구나. 내가 잘 봐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군자가 아닌 소인배이다. 선물 하나에 원칙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반면, 군자는 물질적인 것으로 기쁘게 하기는 어렵고 섬기기는 쉽다. 그 이유는 군자는 완전함을 갖춘 그릇이라서 무리한 것이 아닌 상대방의 그릇에 맞는 합리적인 요구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자는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한다. 반면 소인은 물질적인 것에 기뻐한다. 하지만 사람을 부릴 때에는 자신이 부족한 면이 많기 때문에 완전히 갖추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서 함께 일할 때 가혹하게 질책하고 지나친 요구를 한다면 그는 소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쯤에서 나의 상사였던 부장님을 떠올린다. 그녀는 항상 남의 일까지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들고 와 그 일은 부하들을 시켰다. 부하들은 당연히 교수였던 그녀만큼은 일을 못하는 게 당연했는데 그녀는 항상 성과를 원했다. 그리고 일을 줄 때는 항상 급하지 않은 일이라도 시간을 촉박하게 주었다. 나는 그녀와 일을 하다 응급실에 실려갔다. 퇴사해서 휴직하다가 어쩌다 그곳에서 다시 근무할 기회가 되어서 그녀에게 반갑게 전화를 했다. 처음에는 반갑게 받더니 잠깐 만나서 커피 마시고 싶다고 일정을 물으니 나를 피했다. 내 생각에는 권위적이었던 그녀가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만나겠다고?” 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말로 나를 피했던 것 같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녀는 여전히 왕따로 자신이 욕먹는 건 아는데 왜 욕먹는지를 모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