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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랄 Oct 10. 2021

마흔여섯,   첨 배운 자전거로 세상을 누비다(1)

일 년 간 3000 킬로미터를 주행한 워킹맘의 경험담

(1) 어느 가을날, 갑자기 자전거를 시작하다.


자전거는 보통 어릴 때 배운다. 아주 어릴 때 몸이 아직 말랑말랑 유연할 때 스르륵 배우는 게 보통이다. 이때 시기를 놓친 사람들은 이십 대에 다시 한번 기회가 있다. 힘이 넘치는 청년들이 이런저런 놀 거리를 찾다가 쓱 타게 된다. 이때마저 시기를 놓치게 되면 영영 기회를 잃게 되기 일쑤이다. 나이가 들어서 자전거를 배우자면 운동 신경도 따라주질 않고, 그리고 나이가 더 들면 부상의 위험도 있어서 이래저래 무서워서 못 배우게 된다.


나는 어릴 때 자전거 타는 걸 엄마가 반대해서 못 배웠다. 그 당시에 자전거를 타면 여자들이 아기 낳는데 문제가 생긴다는 생각이 유행해서 엄마가 심하게 반대했다. 엄마는 자전거를 탈 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둘이나 낳은 게 좀 이상하게 생각되긴 했지만, 엄마가 싫어하는 걸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 청년기에 접어 들어서 만나던 남자친구와 자전거를 타려고 가 보았다. 많이 무서웠으나 강촌 강변을 따라서 어느 정도 진행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주 좁은 길을 타고 가는데 한쪽은 사람이 오고 다른 쪽엔 강물이 있는 지라 극도로 겁에 질린 나머지 결국 자전거에서 넘어지고 말았고, 그때 아킬레스 건을 다쳤다. 다행히 끊어지거나 할 정도로 심하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 후 몇 년 정도 아킬레스 건 위로 난 상처가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다쳤다. 그리고는 자전거에 대한 생각을 깨끗이 접어 버렸다.


그렇게 살다가 마흔 중반에 들어서 갑자기 자전거가 타고 싶어졌다. 아들이 생기고 아들이 아빠와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니 몹시 부러워졌다. 나도 끼고 싶었다. 자전거 타는 능력이 없어서 함께 할 수 없다니 좌절감이 생겼다. 그나마 다행히도 달리기를 즐기고 있던 터라 자전거 타는 아들 옆에서 달리면서 함께 갈 수는 있었지만, 나는 숨이 턱에 찼고 아들은 신나게 달릴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자전거를 배워야만 했다. 게다가 집은 우이천 옆에, 직장은 정릉천 옆에, 천혜의 자전거길을 생활권에 두고 있는데, 이 길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인생의 낭비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어떻게든 자전거를 타 내기로 맘먹었다.


나의 디데이는 추석 연휴 기간이었다. 2020년 추석 연휴 중 9월 30일에 식구들과 함께 중랑천의 넓은 운동장 부지로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나는 남편이 2인용 자전거를 태워줘서 함께 갈 수 있었다. 거기에 도착하면 아들의 자전거로 주행 연습을 할 생각이었다. (이 2인용 자전거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의 삶을 함께 한 재산이자 가족 같은 존재로 남편이 자전거 가게에 가서 디자인을 선택해서 만든 특별한 자전거이다. 벌써 우리의 삶을 10년이나 함께 하고 있다. 웬만한 반려견 못지않은 반려거라고나 할까.)


나는 일단 달리기로 몸 컨디션을 조절한 후, 호흡을 가다듬고, 아들의 자전거에 엉덩이를 걸쳤다. 예전에 타 보았던 시도들은 다 무효였다. 나는 오늘 첨 타는 것이었다. 마흔여섯 살에 자전거를 배우게 된 것이었다. 자전거를 배우기에 나이가 많은 편이었지만, 나는 꼭 타고 싶었다. 내 소망은 제법 간절했다.


용케도 나는 넓은 공터를 세 바퀴 돌 수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아이를 피하느라고 넘어지기도 했는데, 터가 넓은 편이라서 스스로 몸을 사릴 수 있어서 많이 아프지 않았다. 세 바퀴를 크게 돌고 난 후 몸의 감각을 익혔고, 나는 첫날의 훈련에 만족했다. 이렇게 며칠씩 계속 조금씩 타면 무리 없이 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자전거를 처음 연습했던 중랑천 부지


그러나 인생은 예측불허. 내 생각과는 달리 나는 그날 바로 실전 주행에 투입되었다.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잘 타던 아들이 첨 타는 곳에 오는 바람에 제 앞에 턱이 있는 걸 못 보고 그만 크게 넘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들은 다리를 약간 절룩댈 정도로 크게 다쳐서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기 어렵게 됐다. 우리에겐 2인용 자전거 한 대와 1인용 자전거 한 대가 남았고, 자전거를 아주 잘 타는 남편과, 오늘 첨 세 바퀴를 돌아본 나, 다리가 아파서 자전거를 탈 수 없는 아들, 이렇게 세 사람이 있었다. 집에 돌아가려면 몇 가지 옵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2인용을 모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남편이 2인용을 몰고 다리를 다친 아들이 그 뒤에 앉으면 딱 맞았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의 1인용 자전거를 어떻게든 집으로 실어 날라야 하는 상황이었다. 타고 갈 것인가, 끌고 갈 것인가. 나의 선택지는 두 개였다. 집은 거기서 3.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왜 이렇게 먼 거야!


나는 그래서 뭐가 됐든지 자전거를 타 보기로 했다. 그나마 자전거 도로로만 달리면 되니까 길이 매끄럽고 사람들이 자전거길로 막 들어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니 약간 위안이 됐다(실전에서는 사실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자전거 길로 많이들 다녀서 한동안은 아주 무섭고 힘들었다. 초보 자전거들도 많아서 자전거 길로 사람이 다니는 게 생각보다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다들 잘 모르는 듯하다). 나는 그래서 생애 처음 3.3 킬로미터 자전거 주행길에 올랐다.


탈 수는 있으나, 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나는 길에서 내 앞을 가로지르거나 내 옆으로 너무 바짝 붙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흥분하면서 경고를 보냈다.

"조심하세요! 저 오늘 자전거 첨 타요! 비키세요! 다쳐요!"

사람들은 찌푸리거나, 이상하다는 표정 혹은 곧 터질 폭탄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길을 비켜 주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나 긴 줄 정말 몰랐었다. 길은 가도 가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사람들은 휴일이라 우이천을 꽉 채우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을 때, 오르막길일 때, 커브가 심할 때엔 그냥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갔다. 그래도 차로 치면 운전면허장을 나와서 도로 주행에 나선 건데, 브레이크를 여러 번 잡았을 뿐이고 어떻게든 가고 있는 게 신났다. 그래 이러고 싶었던 거거든!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하고 나니 기운이 주욱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 아들은 함께 기뻐하면서 나를 응원해 주었다. 이제 자전거로 출근도 하고 아들이랑 전국일주도 해야지! 20년 추석에 큰 버킷리스트 하나를 이룬 셈이 됐다!


나는 이틀 후 생애 두 번째 주행에 다시 성공했다.  

두 남자의 격려를 받으며 무사히 6킬로를 탔다.

일 년에 3000 킬로 대장정은 그렇게 어느 날 훅 시작됐다.

꿈을 이루는 데에 큰 계획이 필요하지 않고 열정만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커버 사진: 끌로드 모네作, 앙티브의 아침(Antibes in the Morning by Claude Monet, 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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