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간 3000 킬로미터를 주행한 워킹맘의 경험담
(5) 바람 부는 날엔 청계천에 가야 한다. 점심시간 라이딩 추가.
11월 15일에 60번째 주행에서 총 주행거리 400킬로미터를 기록했다.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나간 라이딩이었다. 나는 회사 일정 때문에, 아들은 학업 따라잡느라, 둘 다 한창 바쁘다가 일주일 만에 나간 라이딩이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타면 덜 힘든데, 이렇게 살아가는 여건상 어쩔 수 없이 공백이 생기면 자전거를 타는 게 체력이 달리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밤에라도 조금씩 우이천으로 나가서 자전거를 타기도 했는데, 성에도 안 찼고 또 밤이라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도 됐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점심시간에도 라이딩을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출근에 8.5킬로미터, 퇴근에 6.5 킬로미터를 달리고 있었으므로, 점심시간까지 라이딩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었지만, 자출퇴가 일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체력이 통통하게 붙어올라 좀 더 자전거를 타도 좋을 것 같이 여겨졌다. 출퇴근 구간은 완전히 익숙해져서 11월 16일에는 출근길 중 월릉교-이화교 1.21 킬로미터 구간에서 속도 갱신도 할 수 있을 수준이었는데, 무려 시속 18.2킬로미터로 4분 만에 구간을 주파해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니 점심시간에 더 타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운 코스를 달려보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그렇게 점심시간마다 청계천을 달리기 시작했다. 점심은 편의점에 들러서 간단한 끼니를 챙기는 걸로 대신했고, 날씨가 받쳐주는 한도 내에서 필수 모임만 없다면 빼놓지 않고 매일 나갔다. 사실 나는 자전거 중독 상태에 가까워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11시만 되면 창밖을 바라보며 바람맞을 준비를 하는 강아지 모양새가 되었다. 하고 싶어 미치겠는 마음이 장착된 이상 열중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어떤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을 땐 그 일의 매력을 제대로 발견해내는 게 푹 빠져드는 비결인 듯하다.
내가 자전거로 다니던 공간은 내가 차로도 늘 다니던 곳이었는데, 희한하게도 자전거로 달리는 순간 다른 공간으로 재배치되곤 했다. 신호와 도로 사정을 살피면서 내 차에 갇혀서 길을 지나가야 할 때는 세상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전거로 청계천을 달릴 때는 흐르는 물, 서 있는 나무, 오가는 사람들, 오래된 시가지 그 모든 것들이 눈에 다 들어오는 것이었다. 세상이 한껏 내게 다가오는 기분이었고, 내가 세상에 제대로 녹아 있는 것 같았다. 차를 탈 때는 내가 관람객이었고 세상이 2D 그림이었다면, 자전거를 탈 때 나는 3D 세상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11월 17일에 '슬기로운 자전거 생활'이 시작됐다. 점심시간에 종로와 청계천을 누비는 맛이 아주 끝내줬다. 주행 틈틈이 시계를 보면서 회사에 복귀할 시간이 되면 돌아갔는데, 이 날 나는 평균 시속 14.8 킬로미터로 47분 간 11.6 킬로미터를 달렸다. 회사로 돌아가니 사람들은 똑같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앉아 있었고, 나도 다시 운동복에서 일상복으로 갈아 입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업무로 돌아갔다. 자전거 타기는 그야말로 '회사 생활이 더 신나지는 마술'과도 같았다. 이 날 하루 동안 나는 출퇴근과 점심시간을 합쳐서 자전거를 총 26킬로미터를 탔는데, 별로 피곤하진 않았고 되려 활기찬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지 불과 47일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후 점심시간을 이용한 종로와 청계천 방문은 계속됐다. '조금 더 멀리' 가고 싶다는 욕심이 또 발동됐다. 아침에 날씨가 나빠서 자차 출근했다가 점심에 개이기라도 하면 따릉이를 빌려 타고서라도 청계천으로 갔다. 따릉이가 워낙 무거워서 48분 동안 10킬로미터 밖에 진행할 수 없었지만 그만큼이라도 탄 게 즐거웠다. 동대문으로, 두타로, 장충동 체육관으로, 세운 청계상가로, 여기저기 쏘다니며 세상을 보았다. 세운 청계상가는 나중에 빈센조 촬영지가 되고 나서 보니 정말 드라마 속 금가 프라자로 변신한 것처럼 보여서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커버 사진).
청계천은 살아 있는 거리라서 좋았다. 황학동 벼룩시장의 모습이 일부 보존되어 있는 동묘 거리는 그중에서도 제일 활기찼다. 값싸지만 속이 알찬 토스트에 맥심 커피 한 잔으로 배를 채운 사람들은 옛 것들 속에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세상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나는 그들 사이로 차와 사람을 피해 가며 자전거를 어기적어기적 탔다. 낡은 책과 식기들, 전자제품들이 길에 덩그러니 나와서 자신들을 데려가 줄 새 주인을 찾고 있었다. 이런 시장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다가 아차 하고 가던 길을 가곤 했다. 그래도 용케 회사에 늦게 돌아간 적은 없었다. 너무 멀리 갔다가 돌아오느라 숨이 턱에 차 죽을 것 같을지언정 용케도 복귀 시간에 늦지는 않았다.
날씨가 겨울로 접어들어 추워지던 날에는 청계천을 자전거로 달리다가 편의점에 들러서 따끈따끈한 호빵을 하나 사 먹었다. 알알하게 얼은 뺨 안쪽으로 따뜻하게 퍼져나가는 맛난 온기란! 뱃속까지 뜨끈뜨끈해졌다. 맘까지 훈훈해졌다. 살아 있어서 좋은 일이 어찌 이리 많은가 생각하다가, 이제 곧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면 당분간 청계천에 올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니 풀이 죽기도 했다. 안전은 소중한 것이니까. 아무리 자전거가 좋아도 무리해서 타면 안 될 일이었다(이 당시에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었으나 나중에 해가 바뀌고 겨울이 와서 눈이 내리고 난 다음 날 나는 또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그렇게 나는 코로나를 이기고, 겨울 냉기를 뚫고 나올 봄 새싹을 벌써부터 청계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