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물 켜다, 물 먹다, 물 건너가다
우리말 속에 녹아있는 물에 대한 표현을 한번 알아볼까 합니다. 대개 사람의 생각은 말에 녹아들기 때문에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속에서 물에 대한 표현을 찾아보면 우리가 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 ‘물’이 들어간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표현은 ‘물 건너가다’, ‘물로 보다’, ‘헛물켜다’, ‘물 먹다’, ‘물 좋다’ 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은 소중한 자원이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물’이 들어간 우리말 표현 중 대부분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흔하고 하찮은 것, 쉬운 것, 헛것 등의 뜻을 담고 있으니 말이죠. 그나마 긍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물이 좋다’, ‘물이 오르다’ 등도 순수하게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물이 우리 말 속에서 이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우리 눈에 비친 물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은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에 흔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원 중 거의 유일하게 비용을 지불하지 않거나 지불하더라도 아주 작은 비용만 부담했기 때문에 하찮고 쉽게 여겼던 것입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희대의 사기꾼이 된 것도 이 때문이지요.
‘물’이라는 글자를 어떤 단어 앞에 접두사처럼 붙여도 그 단어의 의미를 정반대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수능, 물주먹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물수능이라고 하면 시험이 갑자기 만만해 보이고, 물주먹이라고 하면 맞아도 아프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이 들어간 표현 중 우리가 가장 자주 쓰는 말은 ‘물 건너가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물은 강을 의미하는데요, 강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범접하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았던 옛날에는 강 너머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고, 강 건너 마을에 불이 나도 그건 걱정거리가 아닌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그래서 마을을 구분하는 마을 동(洞), 고을 주(州)의 한자에는 물(氵)이 들어가 있습니다.
‘물 건너가다’의 사전적 의미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불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여기에서 ‘물’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강인 삼도천(三途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죽은 지 7일째 되는 날에 이 강을 건너게 되는데, 일단 건너가면 영영 이승으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물 건너가다’는 말은 이 삼도천을 건너 저승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교에 삼도천이 있다면 기독교에는 요단강 또는 요르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다’는 표현은 한국 기독교의 유명한 찬송가에서 유래한 것으로 죽음을 뜻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삼도천은 실존하지 않는 전설 속의 강이지만, 요단강은 실존하는 강으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 사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하천의 길이로 보면 우리나라의 섬진강과 비슷한 크기입니다.
‘물 건너가다’는 말과 비슷하게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말로 ‘헛물켜다’는 말이 있지요. '헛물켜다'의 뜻은 ‘애쓴 보람 없이 헛일로 되다’의 뜻입니다. 여기서 '헛'은 ‘이유 없는’, ‘보람 없는’을 의미하는 접두사이구요, 우리가 자주 쓰는 헛고생, 헛소리, 헛수고 등에 쓰이는 의미와 같습니다. ‘켜다’는 동사로 ‘물이나 술 따위를 단숨에 들이마시다’, ‘갈증이 나서 물을 자꾸 마시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낱글자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뭔가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물을 마셨는데 결국 기대와 달리 아무 성과 없이 물만 마신 꼴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물 먹었다’와 비슷한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늘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말과 생각 속에는 '헛물켜다', '물 건너가다'처럼 정반대의 의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물은 우리 주변에서 늘 쉽게 접할 수 있어서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야말로 물을 ‘물 보듯’하는 것이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마치 물처럼,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을 ‘물 보듯’ 가볍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이 그렇듯 우리 주변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겐 정말 소중한 사람들인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