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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Sep 27. 2020

아이의 작아진 옷으로부터.

안녕, 고마워.


이 옷을 살 때의 마음이 아직 남아서 옷이 작아진 것을 알면서도 더 이상 아이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이 임박할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 구입한 첫 내복이었다. 마음에 쏙 들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이트에 들어가 이 옷을 구경했다. 구입 버튼을 누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참았었다. 반복유산 이후 아이의 물건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던 때였다. 그래도 이쯤이면 사도 되겠지 하는 마음을 들었다가도 내려놓고 들었다가도 내려놓기를 반복했었다. 그때는 그럴 때였다.


그렇게 큰 맘먹고 다들 산다는 80 사이즈로 내복을 주문했다. 핑크색의 동그란 열매가 빼곡히 그려진 아이의 첫 내복은 한겨울에 입기는 조금 얇았다. 아이가 태어나고도 내내 넣어 놓다 봄이 되어 꺼내 입힌 내가 산 첫 내복.


아이는 어느새 19개월이 되었고 이 가을엔 90 사이즈의 옷을 입는다. 새로 사게 될 옷들은 넉넉히 100을 사야 하는 시기인데 80 사이즈의 저 작은 내복을 기어이 꺼내 입혔다. 그런데 입혀보니 너무 사랑스러운 거다. 이 옷을 사던 그때가 생각이 나서 그리고 이 옷이 커서 몇 번을 접어야 했던 그때도 생각이 나서 마음이 뭉근해지기도 했더랬다.


작아진 옷을 입혀 놓고는 이쁘다 이쁘다 너무 이뻐를 몇 번을 외치고 나니 아이도 기분이 좋은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미소를 짓는다. 아직 짧기는 해도 입을 만을 하네 하며 그 옷을 입혀 잠을 재웠다. 그날 밤, 아이는 몇 번이고 잠에서 깨 짜증 섞인 울음을 울었다. 다리를 주물러 주다 보니 짧은 바지 아랫단이 위로 올라가 아이의 무릎을 압박하고 있었다. 끼어서 내려가지도 올라가지도 않는 바지를 낑낑거리며 벗겨주었는데 얼마나 꼭 끼었던지 다리에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팔도 마찬가지였다. 팔 중간에 내복이 꼭 끼어 여린 팔에 자국을 남겨놓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작아도 입히면 되는 줄 알았다. 그저 보기 싫은 것만 참으면 되는 줄 알았다. 작아진 내복은 보기에 나빠서가 아닌 불편하기에 바꿔줘야 한다는 걸 아이의 작아진 옷을 처음 마주한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가 하루 종일 얼마나 불편했을지, 밤새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었을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이의 짧아진 내복으로부터 배웠다. 때로는 소중한 것일지라도 때로는 아까운 것일 지라도 내어주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각별한 것이라 할 지라도 쓰임을 다하는 때가 온다는 것. 그리고 그때가 오면 이별하는 것 또한 삶의 지혜라는 것을 말이다.


생을 살다 보면 특별한 추억이 깃든 것에 애정을 가지고 애착을 품는다. 평소에도 잘 버리지 못하는 나는 아이와 함께 하면서 소중한 것들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서 더더욱 짐을 늘려 나갔다. 이건 아이를 위해 처음 산 옷인데, 이건 아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장난감인데, 이건 아이가 물었던 젖병인데, 이건 아이 손때가 묻은 책인데... 분명 아이에게는 필요 없어진 물건들을 다 보관하기에도 벅찬 아이의 것들을 버리지도 나누지도 못하고 품고 살았다. 그러나 더 이상 아이에게 필요 없어진 물건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 일 수도 있다.


실은 주변에서 아이의 옷이며 장난감들을 많이 물려주었다. 그때 참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낡은 옷 낡은 장난감이지만 보내 준 박스를 풀어 볼 때마다 그렇게도 설레고 기뻤다. 무엇보다 신경 써서 보내 준 그 마음이 감사해서 기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가장 기뻤고, 그녀에게 당연히 귀하고 소중한 아이가 쓴 물건을 그래서 소중하게 다뤄졌을 그 물건들을 받는 것이 기뻤다. 그럼에도 나는 나눠줄 생각은 못하고 이리도 품고 있었다는 것이 자뭇 부끄러웠다.


아이의 옷장을 정리했다. 더 이상 입지 못하는 옷들이 수두룩 했다. 이렇게 많이 컸나 싶어서 코끝이 시큰거렸다. 몇 번 입히지도 못해 새 것 같은 옷들도 많이 있었다. 미혼모 가정 기부, 보육원 기부를 검색해 보았다. 여기저기 글을 남겨 보았는데 코로나로 인해 기부 거절이 많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로 꼭 필요한 곳을 찾아 기부를 해 볼 생각이다. 


이 옷을 입은 아이는 더 이상 보지 못하겠지만, 아이의 자람을 아쉬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젠 아이에게 맞는 옷을 사 주어야겠다. 이만큼이나 자라온 아이를 칭찬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깨끗하게 입히고 작아지면 누군가에게 조건 없이 내주어야지. 아이의 소중한 추억을 담아 건강을 기원하면서 그녀에게 주어야지.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오늘도 아이의 작아진 옷으로부터 배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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