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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Sep 30. 2020

언어의 정원으로 들어선 아이와

너의 보폭으로.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내가 하는 말을 몇 번씩 곱씹어가며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꽃이야 꽃” “꽃”
“나무네” “나무”
“거긴 엉덩이” “엉덩”
“책 볼까?” “책”
두 음절까지의 말을 따라 한다. 대부분 내가 하는 말의 뒷말이나 인상적인 말을 따라 하는 것 같은데  “이거 하자”하면 “하자”해야 하는데 “싫여”라고도 한다.

아이의 말이 신기해서 일부러 시켜보기도 하고, 아이만의 귀여운 발음을 따라 해보기도 한다. 며칠 전엔 만날 때마다 “할배해봐라 할배 할배” 를 무한 반복하는 울 아빠에게 “하삐”하고 해주어서 무한한 사랑을 받았더랬다.


한편 이런 일도 있었다. 아이가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인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았던지 온종일 칭얼대는 날이었다. 하루 종일 그 기분을 다 받아주다 지친 나머지 혼잣말을 했다 “이상하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징징대지.”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징징”
아이가 다 듣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집에서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 어른 사람'과의 대화는 할 수 없기에 가끔 혼잣말을 주절주절 하곤 했었는데, 그 후로 혼잣말을 끊었다.

아이가 말을 따라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들리는 것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위한 아이만의 의미 있는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징징?”하고 반문하며 그건 무슨 말이에요?라고 묻기도 하고 “꽃”하고 가리키며 자신이 한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엄마가 “그래 맞아, 꽃이네”하고 말하면 퀴즈라도 맞춘 듯이 미소를 지으며 팔랑팔랑 거리며 걷는다.

그렇게 알고자 하는 본능을 따라 언어로 의사를 표현하려는 욕구가 이전보다 훨씬 증폭되었다. 물을 먹고 싶을 때 “무- 무 무”라고 말하고, 뚜껑을 열려다 잘 되지 않으면 “엄마 엄마”하고 도움을 청한다. 어느 날엔 “치우 치우 치우”를 반복하는데 아무리 들어도 알 길이 없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따라 했다. 아이의 말을 알고 싶어서 “미안해 엄마가 잘 모르겠어 뭘까 치우?”라고 하다 “혹시 치즈?”라고 하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려는 듯 “치지”라고 했다.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 주었더니 어찌나 좋아하던지. 그렇게 늘 알아들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럴 땐 정말 통역기라도 발명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는 언어적 표현만 는 것이 아니다. 몸의 표현도 덩달아 늘었다. 하고 싶은 말은 수만 가지인데 생각만큼 말로 표현이 되지 않을 때 나를 때리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많아졌다. 고집도 제법 생기고, 하고 싶은 것을 제지당할 때에는 통곡을 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그러는지 알기에 하나하나 마음을 읽어 주다가도 때로는 덩달아 화를 내게 되는 날도 있었다.

주변의 육아 선배들에게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다들 입을 모아 말한다. 지금이 '딱 그럴 시기' '그럴 때'라고.

그럴 때, 그럴 시기. 그것을 알아채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이 그럴 때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아이의 행동이 종종 미워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는 잘못된 양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에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때'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이와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기 시작하는 때, 고집이 생기는 때,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 호기심이 많아지는 시기라고 이름만 붙여주어도 마음은 편안해진다.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정상적인 발달단계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응원하게 되고 흐뭇하게 바라볼 여유까지 생겨난다. 그러고 나면 엄마의 시선은 따뜻해지고 아이가 맞닥드린 모든 난관에서 안내자이자 통역사 그리고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늘 곁에서 아이가 홀로 애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아이의 시기, 아이의 때를 잘 알아봐 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아기 일 때, 나의 눈과 귀는 언제나 그 조그마한 아기에게 가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면밀히 귀 기울였다. 그래야만 했다. 아이가 잠에서 깨 울면 배고픈 울음이구나. 큰소리에 울면 놀랐나 보네. 웃어주면 이런 장난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아이의 언어를 읽어내려, 아이의 언어를 이해하려 부단히 애를 썼다. 그리도 자그마하던 아이가, 울고 먹고 자고만 할 줄 아는 것 같았던 아이가 이제는 나의 언어를 배우려 한다. 머물지 않고 나날이 옴싹 옴싹 자라나고 있었다.


좋을 땐 어떻게 표현하는지, 화가 날 땐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물건은 왜 던지면 안 되는지, 엄마는 왜 때리면 안 되는지 아이가 비로소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나의 세상으로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단코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기만 해도 결단코.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내 아이가 그렇듯 모든 어른이 지나온 시절이며, 나도 우리도 아이가 아니었던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거기까지 가 닿으면 신기하게도 훨씬 너그러워지고 조금 더 자애로워진다. 우리도 아이 었으니까 아이의 '아이스러움'을 그 '한없는 미흡함'을 몹시도 사랑하게 된다. 언제까지고 그 시간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걸 알기에. 아이와 나의 오늘은, 지금 이 시절은 유수처럼 흘러가고 말 것을 알기에 몹시도 몹시도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이는 오늘도 한껏 짜증을 부리다 잠이 들었다. 언어의 정원으로 이제 막 발을 디딘, 매일 아름다운 단어를 수집하러 다니는, 움직임이 곧 언어였던 17개월 아기의 세상 공부는 이제부터가 시작일 테지.


‘나의 보폭이 아닌 아이의 보폭으로, 아이의 지금 이 시절을 존중하는 자세로.’ 매일 아침, 그렇게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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