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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 머리 앤 Dec 03. 2020

빈곤 포르노

세상을 진실되게 바라보는 법

세상은 점점 덜 가난해지고 더 평등해지고 있다.


세계 은행이 발간한 빈곤 보고서에 따르면, 1995년도에만 해도 세계 인구의 35%에 달하는 18.5억 명의 빈곤 인구는 2015년도에 이르러 1990년 집계 이래 최저치인 7억 3600만 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우리는 실직적으로 빈곤 인구가 ‘어떻게’ ‘얼마나’ 감소하고 있으며,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잘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던 국가의 사람들이 현재 얼마나 발전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있는 빈곤의 이미지란 오로지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의 모습.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들의 곁에 파리가 죽음을 상징하듯 날아다니는 파리들. 식량이 없어 진흙 쿠키를 만들어서 먹는 아이들.’의 모습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빈곤에 대한 프레임은 주로 ‘빈곤 포르노’를 통해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성적 행위를 묘사한 소설,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 포르노와 빈곤의 결합이라니, 도대체 빈곤 장면을 묘사한 포스터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어서 이러한 이름으로 표현하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포르노라고 부른 포르노그래피와 빈곤의 묘사에 있어서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실재의 의도적 왜곡과 편집’이다.      


“당신들은 나를 위해 촬영하는 것이 아니군요”     


깨끗한 물을 마시고 쾌적한 생활을 하는 필리핀 소녀를 보며, 이 장면이 후원자들의 모금을 이끌어내기에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비정부 기구의 직원들이 소녀에게 강제로 오염된 물을 마시게 하자, 그 소녀는 그 직원들에게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했던 ‘빈곤의 조건’에 소녀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의 연출을 위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빈곤에 그 소녀를 맞춘다. 그러니 그 상황 속에서 소녀는 후원을 발판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아이가 아니라 인간성을 잃고 획일화된 빈곤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렇게 획일화된 빈곤의 모습에 노출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머릿속에 빈곤의 이미지를 한 가지로 적립한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러한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내가 후원하고 있는 아이의 인적 사항을 봤을 때, 내가 생각했던 빈곤의 이미지와 완전히 달라서 퍽 당황했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수많은 부정적인 점들을 안고 있는 ‘빈곤 포르노’라는 콘텐츠를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기부를 하는 원인을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기부를 선택하는 이유는 주로 ‘감정'이다. 동정심, 윤리적 책임감, 죄책감 등이 늘 대다수의 사람들이 기부하는 이유이다. 즉, 기부를 하는 데 있어서 스스로의 감정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의 감정을 좀 더 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빈곤 포르노가 우리 사회에는 성행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부가 경쟁이 되어버린 시대에, 더 많은 기부금, 더 많은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서, 기부 단체들은 더 강하고 더 자극적인 이미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 포르노는 여전히 많은 기부금을 모금하는데 기여하고, 이 기부금이 해외 원조에 사용될 것이니 실제로도 우리 사회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실이 득보다 더 크다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부의 원천은 ‘동정심’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기부한다고 해서 함부로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빈곤 포르노는 감정에 호소하여 사람들의 기부를 유도한다. 동정심과 타인에 대한 죄책감으로 기부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죄책감 광고는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준다. 즉, 사람들의 지속적인 기부를 이끌어 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부라는 이미지를 죄책감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와 연결할 때, 우리들의 기부는 일차원적인 기부에서 넘어설 수 없다.      


게다가 죄책감을 자극하는 빈곤 포르노는 빈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람들이 직시할 수 없게 만든다. 빈곤 포르노를 보면, 우리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이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라는 일종의 감정을 유도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사고는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그들의 빈곤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빈곤 국가들의 빈곤을 유도한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 빈곤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기부할 것을 촉구하는 기부 단체들이 있는 서구 국가들이다. 분명한 원인이 있는 결과의 원인을 우리 모두에게서 찾으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일정한 형태의 빈곤 프레임을 형성하는 것 역시 문제이다. 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있듯이 빈곤의 형태도 다양하다. 아예 기초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의 빈곤이 있으면, 학교를 가고 자신의 이상적인 삶을 실천하지 못하는 수준의 빈곤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빈곤 포르노는 빈곤의 모습을 획일화하여 극단적인 빈곤이 아닌 빈곤 상태에 처하지 않은 사람들은 빈곤이 아니라고 인식하게 한다. 이는 자원의 비효율적인 분배에까지 이를 수 있는 문제인데, 이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빈곤의 이미지에서 배제되는 이들에 대해서는 후원을 거부한다. 즉, 진정으로 도와야 할 사람들을 돕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얼마나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인가 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이미지 정보를 더 중요한 판단의 근거로 보는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에서 유도된 부정적 측면인데, 이러한 인간의 특성 때문에 기부 단체들은 프레임에 맞는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서 자원을 더 사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출은 후원을 받는 대상들이 스스로를 무기력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 역시 큰 문제이다. 후원금을 이용하여 스스로를 발전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후원만을 기대하는 수동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정한 국가에 대해서 그들의 민족성이나 성격을 빈곤의 원인으로 단정 지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빈곤 문제를 더 나은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빈곤 문제에 원인이 있고 책임져야 할 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빈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힘을 합쳐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대상인 것은 자명하다.      


먼저 그들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매년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광고제에서 ‘The Golden Radiator’ 상을 수상한 작품은 아프리카 인들을 빈곤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1분 남짓 되는 짧은 광고 속에서, 그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다른 이들을 도울만한 힘이 있는 사람들로 비춰진다. 이 상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상의 투표자들이 네티즌이라는 점이다. 네티즌들의 투표가 만든 결과라는 점은, 기부자들도 자신들이 후원하는 대상이 단순히 무기력한 사람들로 남아있기 만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한 기부 광고의 또 다른 사례는 ‘키바’이다. 단순한 기부가 아닌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해주는 소액 대출 플랫폼 ‘키바’는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원조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로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후원자와 피후원자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창업의 기회를 제공해 그들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기존의 빈곤 프레임을 깨고 더 나은 빈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처럼 우리 사회는 새로운 형식의 기부 광고를 형성해야 하며 그 기반에는 그들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사상이 깔려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배제된 빈곤 포르노는 더 이상 구조의 수단이 되지 못한다. ‘마케팅’의 수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가 돕는다고 생각했던 사진 속의 아이들은 기부를 유도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빈곤하다는 것이 존엄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존엄하다는 건 무언가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올바른 기부란 이렇듯 존엄한 발전을 이끄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빈곤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이상하고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사회를 이끌어 나갈 또 다른 존재들일뿐이며, 그들이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일부이기에, 함께 살아가야 할 이들이기에 기부를 통해 공동의 발전을 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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