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경상도 지방에 내려와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연애를 시작하며 그 지역명을 처음 알게 될 정도로 연고 없던 곳. 내게는 유럽이나 미국보다도 멀고 먼 미지의 땅이었다. 늘 곁에 있던 가족도, 친구도 없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 점이 신혼 생활을 더 애틋하게 만들어주었다. 남편은 배우자이자 내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때로는 아빠의 넓은 품처럼 나를 살뜰히 품어주었다.
주변 환경이 어떻고 편의시설이 얼마나 있는지는 상관없었다. 단지 우리는 드디어 '우리만의' 보금자리가 생겼음에 감탄했고 더 이상 서로의 귀갓길을 배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마냥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신혼 생활에 잠시 제동이 걸린 듯했다.
아이가 생긴 것이다. 결혼한 지 2달이 갓 지났을 무렵이었다.
영원히 임산부의 몸으로 살게 될 것 같은 착각도 잠시. 아이는 건강하게 세상에 나왔다. 내가 알고 있던 하루는 분명 24시간이었는데, 아이와 함께 하는 하루는 그보다 훨씬 길었다. 하루의 시작점과 끝점이 없었다. 그저 내 시간은 2시간을 주기로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데 온 혈안이 되어있었다.
신생아기를 지나면서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꽁꽁 얼었던 길도 다 녹아 어느새 봄이 와 있었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가벼워졌고 너나 할 것 없이 꽃구경에 한창인 듯했다. 나도 그 봄바람을 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들썩거렸다.
평일에는 남편의 퇴근시간 전까지 아이와 나 오롯이 둘만의 시간이었다. 주변의 편의시설이 아예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카페를 가거나 장을 보러 가려해도 꼭 차가 필요했다. 슬프게도 나는 장롱 운전면허 소지자였고, 더 슬프게도 나는 운전을 다시 배워보겠다는 배짱도 없는 소심한 초보 엄마였다는 것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신혼 생활을 시작하는 그곳이 시골이든 대도시든 상관없다고 했던 내 관점이 조금 바뀌기 시작한 것이.
시속 20km로 벌벌 거리며 주행 연습을 하는 나에게 아이를 차에 태우고 둘이 외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짧은 거리만 배회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또래 아기를 키우는 이웃 엄마는 능숙한 운전 솜씨로 아이와 함께 다양한 체험들을 한다고 했다. 함께 문화센터 활동(아이 놀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체험)도 시작하고 키즈카페에도 다녀온다고 했다. 소근육과 대근육을 발달시키는데 아주 유용하고 시간도 잘 간다고 일러주었다.
별안간 또 불안함이 엄습했다. 어린이집을 빨리 보내는 엄마들은 벌써 소모임도 여러 개 있는듯했다. 빠릿빠릿하게 모여 아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유대감을 쌓는 엄마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기도,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건가?'
마음은 자주 심란해졌다.
가족도, 친구도 곁에 없는 외지. 게다가 아직 그 지역에 대한 이해도 애정도 부족한 운전 못하는 이방인. 낯선 곳이어서 더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던 그곳은, '육아'라는 렌즈가 입혀지니 달리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평일에 차를 타고 외출하는 대신 주변을 짧게 산책하고 귀가하기. 답답하면 바로 아기띠로 아기를 안아 들고 천천히 걸었다. 아이는 처음에는 눈이 동그래져서 '여기는 어디지?' 하는 눈망울로 세상을 탐색하다가 이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한 손으로는 아이의 엉덩이를 받치고, 한 손으로는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을 수없이 쓰다듬으며 길을 걸었다. 아이는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와 기분 좋게 머리칼을 흔들고 가버리는 바람결을 자장가 삼아 새근새근 잤다. 그제야 내가 살고 있던 주변의 환경이 찬찬히 보이기 시작했다.
무료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불완전한 환경에 있다고 생각했던 조급한 마음이, 어느샌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나만 아이에게 다양한 체험을 못 시켜주고 있다는 불안함은, 체험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온전히 나와 깊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이와 함께 눈 마주치는 시간을 더 벌었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퇴근 시각 이후에는 두 팔 벗고 나서서 육아를 함께 하는 남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 생각의 전환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몫이 크다. 우리는 주말이 되면 도시로, 바다로, 주변 공원으로 나갔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주말의 장거리 외출에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우며 보낼지 상상하며 평일을 지내는 것도 큰 설렘이었다.
키즈카페에 가서 신나게 놀 수 있는 연령이 되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삼켜버렸다. 바이러스가 없던 때처럼 갑작스러운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여러모로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우리는 하루의 최대치로 눈을 맞추고 살을 맞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환경이 바뀌고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 안에서 맞춰 살아간다. 도대체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인가 울상을 짓다가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행복은 도처에 깔려있다. 단지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바라보느냐- 그 문제이지.
아이와 즐길거리가 많이 없는 환경이라고 투덜대던 나를 돌아본다. 운전대도 못 잡는 소심한 엄마로, 다른 엄마들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한없이 소극적인 엄마로 나를 깔아뭉개던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조용히 과거의 나에게 말한다.
문화센터에 갈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괜찮고, 키즈카페를 가지 않는다고, 조리원 동기 친구들이 없다고 속상해할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