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 앞에만 서면 헛헛함이 밀려왔다. 결혼 후, 집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잘못한 게 없어도 눈치를 봤다. 남편과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 일상이 돌아갔다. 학교도 회사도 가지 않으니, ‘내가 하고 말지’ 영역이 늘었고, 그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급도 수당도 명퇴도 없는 무급노동에 힘이 부쳤다.
허리가 저릿할 정도로 부엌과 세탁실, 화장실을 오가다 “왜 양말을 또 이렇게 벗었어. 젖은 수건 침대에 두지 말랬잖아. 다 먹은 그릇은 싱크대에 두랬지!”소리를 지르며 엉뚱한 곳에 화를 토해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할까?’란 생각에 절로 숨이 턱 막혔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는 빨래 더미도, 화장실 타일에 낀 까만곰팡이도, 날 파리가 꼬이기 시작한 쓰레기 뭉치도 내 눈에만 거슬렸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에 정신을 빼앗긴 세 남자를 볼 때면 바글바글 속이 끓었다. 이 집에선 나만 평온하지 못했다. 일거리가 득실대는 집구석이 내 숨을 조여왔다.
내가 누군지 자꾸만 잊어버렸고 난 살림하는 기계, 남편의 성욕을 채워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휩쓸려 사는 삶에 숟가락을 얹는 게 몸서리치도록 싫었다. 때늦은 자아 찾기를 해봤지만 그건 용쓰면 해결되는 일도, 돈벌이가 되는 일도 아니었다. 푹 꺼진 내 맘에서 ‘내 몸 하나 썩어 문드러져도 너희들을 모를 테지.’ 온갖 저주가 쏟아져 나왔다. 내 마음은 갈수록 가라앉았고, 그런 내가 점점 더 질렸다.
모두 잠든 새벽, 갑자기 눈이 떠졌다. 문득 이렇게 없어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잠옷 위 외투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썼다. 어슴푸레 밝아 오는 빛 속을 무작정 걸었다. 어디든 몇 시간이든 상관없었다. 새벽 찬 공기가 귓불을 건드렸다. 어떠한 책임도, 역할도, 몫도 없는 공간에서 오롯이 ‘나’만 보는 시간. 코를 찌르는 산 공기, 막 피어난 꽃향기, 청량한 새소리 등 눈, 코, 귀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새로웠다. 처음 맛본 해방감이었다. ‘10분, 20분이면 될 것을 여태 난 왜 몰랐을까.’
걷다 든 생각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자연스레 글을 썼다. 구색에 맞춰 쓰려고 하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은유 작가의 책을 적바림 하며 아래 글귀를 맘에 품었다.
자식이 울까 봐 미리 우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웃어서 자식도 웃게 하는 그런 행복한 엄마들이 많아지는 세상.
좋은 엄마를 내려두고 쓰는 엄마에 충실해도 된다고. 좋은 엄마와 쓰는 엄마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며 공존 가능하다고.
'좋은 엄마 대신 쓰는 엄마가 되어도 될까?'를 끊임없이 물었다. 쓰는 엄마가 되면 자연스레 좋은 엄마도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왕이면 웃으며 쓰는 엄마가 되겠다는 각오로 밥풀이 말라붙은 식탁 위에 노트북을 펼쳤다. 쓰다만 원고를 주무르다 주말 아침이면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모두 잠든 사이 슬며시 나오는 게 이렇게나 통쾌한 일인가를 되물으며. 그들이 버린 시간을 줍는 심정으로 산에서, 카페에서, 호숫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누구나 지질한 나를 마주하며 변화의 계기를 찾는다. 멋들어진 글을 쓰지 못해도 괜찮다. 혼자 마시는 아침공기와 커피 한잔으로도 충분하니까. 찰기 적당한 밥을 지으며 생명 연장에 일조한 나를 이젠 알아봐 줄 수 있다.
걷고 뒤돌아 보는 잠깐의 쉼, 나로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가당키나 했을까. 살아내고 있는 우리에게 매 순간 ‘인정’은 필요하다. 나만의 시공간에서 발칙한 자아 찾기도.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땐 주위를 둘러보자.
파랑새도 비둘기도 참새도 제비도 심지어 거위도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까꿍:) 얘들아
PS. 요즘은 배웅을 받고 나가보기도 합니다. 감격스러운 일인데 또 당연한 듯 잊네요. 묵은지 같은 말이지만,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되돌아가서 감사하는 일만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도 없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