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틀 전 편집장님과 38분간 통화 한 박현아라고 합니다. 부족한 제 원고를 읽고 계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출판계가 어렵단 얘기를 익히 들었습니다. 책을 사서 읽는 인구가 급속도로 줄어드는 시대에 출간을 의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셨을까요. 글로도 흘러가는 말로도 전했지만 또 전합니다. 편집장님, 저에게 출간을 의뢰해 주셔서울트라캡숑킹왕짱무량대수곱절만큼 감사합니다.
출간 제안을 받으면 로또 1등도 부럽지 않다가도 닳도록 본 원고를 피드백받을 땐 한 없이 초조해집니다. 마치 수술을 앞둔 환자처럼요. 어느 부위를 어떻게 도려내고 꿰맬지 모르고 수술대에 누워있는 심정이랄까요.
연락 주시기로 한 6월 말이 다가올수록 홀린 듯 밖을 쏘다녔습니다. 'PC교정(1차) 파일'을 클릭하는 순간이 최대한 느리게 오길 바라면서요. 덕분에 영화 감상과 쇼핑, 산책을 원 없이 했습니다. 대구에서 천안, 대전, 서울을 오가며 보고픈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7월 1일 오후 1시 4분. 드디어 올 것이 왔더군요.‘너무 오랜만에 연락드렸어요.’로 시작하는 메일을 저는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기다리지 않고 (피해다녀서) 감사 인사를 받기가 쑥쓰럽습니다.
몇 번이나 겪은 일이지만 역시나 새로웠습니다. 알림이 뜨자마자 참지 못하고 클릭해 버렸죠. 제 원고를 어떻게 보셨을지, 얼마나 수정해야 할지, 어떤 내용이 마음에 드셨는지 궁금해 참을 수가 있어야지요. 한글파일을 열어보니 파란 글자가 쏟아졌습니다. 예상한 바였습니다. 마우스 휠을 굴릴수록 덩달아 제 얼굴도 파래졌습니다. 네 권의 책을 썼지만 이렇게나 원고를 샅샅이 해체해 검토한 편집장님은 처음이었니까요. 제가 놓쳤던 배경과 캐릭터 설정을 콕 집어주셨더군요. 부끄러웠습니다. 옷과 신발, 가방까지 깔맞춤 해놓고 속옷 갈아입는 걸 깜빡한 기분이랄까요. 차근차근 갈고닦은 기본기 없이 자아도취 상태로 빠져 쓴 이야기란 걸 대놓고 들켜버린 게지요.
“작가님,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세요. 원고가 별로란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욕심이 나서 그래요.” 38분간의 통화를 마무리 짓는 편집장님의 멘트를 듣지 못했다면, 전 일주일 내내 이불 킥하다 호흡곤란이 왔을 겁니다. 흐름이 거칠고, 비유가 모호하고, 캐릭터와 배경 설정이 명확하진 않은 점 동의합니다.
하지만 문학적인(?) 문체가 돋보이는 참신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란 걸 우선 기억해보려 합니다. 칭찬을 입력해야 용기가 생겨서요. 아낌없이 버릴 용기, 의심할 용기, 다시 고쳐 쓸 용기가 지금 절실히 필요합니다. 용기 3종 세트가 부디 저에게 선물처럼 배달되길 바라며, 부치지 못할 편지의 마무리를 기도로 대신합니다.
그땐 보이지 않던 구멍이 오늘부턴 보이길 기도합니다.(일단 아멘)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변비와 치질이 이번만큼은 피해 가길 기도합니다.(관셈보살)
한 달 뒤 ‘1차 수정원고입니다’란 메일을 편집장님께 보낼 수 있길 바라며, (남묘호렌게쿄)
끙끙의 시간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 또한 제 복이니까요.
편집장님, 뜨겁고 습한 기운은 제가 대신 다 가져갈 테니 2차 피드백은 살살 부탁드립니다.
PS. 그러고 보니 편집장님, 제가 성함을 못 여쭤봤네요. 알려주셨는데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걸까요.
주고받은 메일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름을 찾지 못했어요. 혹시 다시 여쭤 보면 실례일까요?
그런데 편집장님, 제 원고를 왜 고르셨을까요? 대체 어디서 확 꽂히셨나요?
제 이야기가 그렇게 엉성한가요? 엉성한데도 불구하고 계약한 이유를 다섯 가지 이상 말씀 해주세요. 편집장님이 생각하는 문학적인 문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예시로 어느 장, 어느 문단, 몇 번째 문장일까요?) 제 글을 점수로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몇 점 정도일까요? 작가로서의 미래가 보이나요? 진로 선택 다시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