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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Sep 06. 2024

그해 가을

가을 햇살치고는 따갑고, 여름 햇살치고는 부드러운 빛

4.


하얀 반 양말에 까만 구두, 귀밑 오 센티 똑 단발머리 소녀 무리가 분식집 앞에 모여있다. 되직한 양념에 버무려진 밀 떡볶이, 투명한 무 사이로 둥둥 떠 있는 어묵, 자욱한 연기를 품고 누운 염통 꼬치는 **여중 앞 분식집 인기 메뉴다. 두 손을 모은 채 입맛을 다시는 진하 옆을 화영이 지킨다. 빨간 앞치마를 두른 아줌마가 호떡 누르개를 염통 꼬치에 갖다 댄다. ‘지지직’ 소리에 소녀들은 눈을 떼지 못한다.


진하를 비롯한 소녀들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와 꼬치를 맞바꾼다. 진하는 성에 안 차는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더 꺼낸다. 이천 원을 받은 아줌마가 속도를 낸다. 꼬치를 차례대로 뒤집고 재빠르게 누르개로 꾹꾹 누른다. 진하는 양념통에 푹 빠진 붓을 들고 기다린다. 꼬치를 건네받자마자 붓으로 정성껏 갈색 소스를 바른다. 데리야끼향이 스민 탱글탱글한 염통 하나를 앞니로 쏙 빼먹는다. 달콤 짭짜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진하가 먹은 자리에 대나무 꼬치가 수북이 쌓인다. 


진하가 염통을 씹는 동안 화영은 종이컵 테두리를 씹으며 그 모습을 지켜본다. 보통 때 같으면 잔소리를 하고도 남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고 있다. 화영은 씹던 종이컵을 버리고 진하에게 동전을 내민다.


 “더 먹고 싶으면, 그냥 더 먹을래?”


진하는 놀란 얼굴로 화영을 쳐다본다. 진득한 양념이 하얀 운동화 위로 떨어진 것도 모르고 헐벗은 꼬치만 들고 서 있다.


 “웬일이야? 아까부터 왜 나 안 말리나 싶었는데, 더 먹으라니… 너 진심이야?”


 아줌마에게 ‘또 올게요.’란 말을 남긴 진하는 화영을 끌고 분식집 옆 문구점으로 들어간다. 진하는 화영의 시선이 문구점 문 앞에 붙은 브로마이드에 꽂힌 걸 꼬치를 먹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저씨, 쎄씨 9월호 잡지 다 나갔어요?”

 “9월호에 무슨 복권 당첨번호라도 쓰여있니? 왜 다들 그것만 찾고 그러는지… 참.”

 “아저씨, 여기 있는 게 다예요?”

 “아니, 두 권 더 있어. 혹시 부록으로 주는 이 브로마이드 때문이야?” 

 진하가 눈을 찌푸리며 애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 3일 뒤에 용돈 받는데, 그때 꼭 사러 올 테니 한 권만 따로 빼두면 안 돼요?”     

 그 말을 듣고 있던 화영이 진하 팔꿈치 끌어당겼다. 진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저씨를 졸라댔다.

 “아저씨, 제발 제발요. 저 여기 단골이잖아요. 우리 할머니가 외상을 갚으러 올 때마다 공짜로 나물도 주고 그랬잖아요.”

 ‘거 참, 어허.’를 도돌이표처럼 내뱉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화영은 진하를 끌고 나왔다.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3일 뒤에 용돈은 무슨, 너 일주일 있어야 받잖아. 할머니한테 또 거짓말하려고?”

 “너 다음 주에 생일이잖아, 내가 선물로 사주려고 했지. 저 그룹 노래 좋아하잖아. 어제 뮤직뱅크 보면서 온갖 야단법석을 떨어놓고서는….”     


 9월 하늘은 아직도 쨍한 파란색이었다. 코발트블루 빛을 뽐내는 하늘 위로 구름송이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가을 햇살이라기엔 따갑고 여름 햇살치고는 부드러운 빛이 화영과 진하를 비췄다. 둘은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흔들며 걸었다. 진하의 어깨에 화영의 팔꿈치가 부딪힐 때마다 신주머니 두 개가 달랑거렸다.     


 약속이라 한 듯 둘은 화영이네 가게로 향했다. 화영이 가게에 들어서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진하 티브이 보려고 왔….” 화영이 말을 하다 멈췄다. 노란 커튼을 헤치고 나온 정체 모를 남성이 화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뒤따라 나온 화영의 엄마가 굳은 얼굴로 인사했다. 

“어… 진하, 왔니?”

그때 웃통을 벗은 남성이 화영을 향해 소리쳤다.

“딸, 여기 와서 등에 물 좀 부어봐. 9월 날씨가 뭐 이래.”


화영은 굳은 얼굴로 가게 옆 수돗가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고무 대야에 있는 물을 바가지로 떠서 남성의 등위로 주르르 부었다. 바가지로 물을 퍼서 붓기를 몇 번, 남성의 입에서 ‘으, 이제 좀 살 것 같네.’란 말이 터져 나왔다. 그는 화영이 든 바가지를 가로채 자신의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목에 수건을 두른 그는 손으로 머리를 털며 화영과 진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씩 웃으며 진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진하는 웃을 때 드러나는 금이빨이 거북했다. 반짝이는 게 좋아 보이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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