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란 글자를 붙이기도 아까운 사람
6.
화영을 외롭게 하는 건 낯선 동네도 학교도 친구도 아니었다. 아빠를 따라 낮과 밤을 바꾼 엄마였다. 화영의 아빠는 새벽마다 택시를 몰았다. 돈을 더 벌겠다며 시커먼 밤에 출근하고 해가 고개를 막 내미는 새벽에 퇴근했다. 화영의 엄마는 늦은 저녁을 차리고 해가 뜰 때까지 식탁과 소파를 오가며 아빠를 기다렸다. 그리고 반쯤 감긴 눈으로 청소와 빨래를 하고 화영의 끼니를 챙겼다. 화영이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고 하면 드르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녀오셨어요?”라는 화영의 말을 듣고도 아빠는 방으로 들어갔다. 움푹 파인 눈과 푸석한 뺨. 아빠와 엄마의 얼굴은 어느새 닮아갔다. 어둠은 어둠에게만 친절한 법이던가. 눈 밑에 짙게 깔린 어둠은 손쉽게 영역을 확장했다. 화영이 교복을 입고 현관을 나서면 엄마는 형광등 불을 끄고 커튼을 쳤다. 화영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빠는 깜깜한 방 안에서 등을 보인 채 누워만 있었다. 암막 커튼이 빛을 잡아먹은 공간을 채우는 건 아빠의 숨소리뿐이었다. 화영은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식을 먹었다. 열여섯 화영이 해야 하는 일은 숙제와 공부가 아니었다.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는 아빠가 있던 자리에 엄마가 누워 있었다. 자지 않고 누워만 있는 엄마와 낮에도 밤에도 집을 비우는 아빠 사이에서 화영은 서서히 불안했다. 아빠라는 사람이 생기면 벌어질 일을 기대한 자신이 한심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에게 기대를 품기가 어려운 걸 알았음에도, 자신의 아빠가 그런 존재가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사실 화영은 있지만 없는 존재가 된 아빠보다 잠을 잊은 엄마가 더 신경 쓰였다. 잘 자지 못하면 잘 먹지도 못한다는 걸 엄마를 보며 알았다. 엄마는 예전처럼 ‘사정이 있겠지’라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가시가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돌아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는 하루는 짜증을 불러왔고 엄마의 식욕도 꺼뜨렸다.
“넌 왜 제대로 하는 게 없니? 엄마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왜 말을 못 알아듣니!”
엄마의 짜증을 피해 화영은 숨었다. 책을 펴고 얼굴을 묻고, 펜을 들고 몸을 웅크렸다. 엄마의 광대뼈가 도드라질수록 화영도 식욕을 잃어갔다. 아빠란 사람은 뜬금없이 집에 들러 엄마에게 밥을 내놓으라고 했다. 엄마는 화영에게 모든 노여움을 소진한 건지 그 어떤 것도 아빠에게 묻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밥상 위에 반찬과 밥을 꺼내 놓을 뿐이었다.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아빠의 입을 보면 화영은 구역질이 올라왔다.
달콤한 팥앙금 속에 끼어있을 수만 있다면 썩은 호두가 되어도 괜찮았다. 다시 시장 골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진하와 진하의 할머니가 있던 그곳으로. 아빠는 그때도 지금도 어쩌다 한번 들리는 손님이었다. ‘님’이란 글자를 붙이기도 아까운 사람. 한 달에 대여섯 번 나타나던 아빠는 어느 순간 발길을 끊었다. 그러고 보면 화영은 ‘아빠’란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 부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연습만 하다 끝나 버린 게 다행이라고 백 번쯤 생각했다.
우편함에 꽂힌 봉투가 날마다 늘어갔다. 엄마는 봉투 속 글자를 읽을 때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장으로 둘러싸인 동네의 작은 빌라는 가게를 처분해서 마련한 집이었다. 엄마의 세월과 맞바꾼 열 평 남짓한 집에서 화영은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마주하기 힘든 진실은 늘 그렇듯 예고 없이 휘몰아쳤다. 화영이 아빠라고 부를 뻔한 사람은 새벽마다 택시를 몰았던 게 아니라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빨간 카드를 뒤집었고, 엄마 이름으로 대출까지 받아 판돈을 키웠다. 심지어 그에게는 ‘아빠’라고 당당히 부르는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화영과 엄마의 세계는 한 사람으로 인해 처참히 무너졌다. 엄마에겐 두 번째 남편이자, 화영에겐 첫 번째 아빠였던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화영은 진하에게 편지를 썼다. 부치지 못할 편지라도 써야만 했다. 화영은 진하에게 묻고 싶었다. 아니, 누군가 자신에게 물어봐 주길 원했다. 너의 하루는 어떠냐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그리고 듣고 싶었다. 그런 하루를 견딘 네가 대견하다고. 버티기 힘들 땐 눈치 보지 말고 이곳으로 와도 된다고. 화영은 쓰던 글을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썼다. 닿기만 하면 서로 닳아버리는 지우개와 종이처럼, 화영은 진하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닳았다. 보풀이 가득 올라온 종이를 검지로 보듬으며 화영은 숨죽여 울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당장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