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와 농담을 걷어내고 진심과 진실로 채운
7.
화영은 말없이 떠난 대가로 무엇이 돌아올지 두려웠다. 부치지 못할 편지가 서랍 가득 쌓였다. 편지에 쏟아낸 마음을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자그맣게 결심했다. 부칠 수 있는 편지를 쓰겠다고. 편지지 첫 줄에 ‘잘 지냈어?’라고 쓰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일단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먼저 안부 따위를 물어야 할 것만 같아서. 화영은 기꺼이 감수했다. 마음과 손이 따로 노는 글을 쓰는 곤혹을. 진하에게 답장이 오지 않더라도 상처받지 않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다. ‘사정이 있겠지’와 ‘그럴 수 있어’를 되내며 밤을 지새웠다. 두 번째, 세 번째 보낼 편지를 쓰면서 마음을 다독였다. 혼자 감당해야 할 어둠이 화영을 조여올 때마다 진하가 보낸 편지를 읽는 상상을 했다. 시험이 끝나면, 바쁜 게 없으면, 너를 보러 가겠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길 간절히 바랐다.
상상만으로도 아프고 따뜻했다. 섞일 수 없는 두 감정은 기다림의 시간을 버티는 힘이었다. 진하의 향기가 스민 밤은 수시로 찾아왔고 한 계절이 지났다. 화영의 엄마는 쉬지 않고 세탁기를 돌렸다. 가을 내내 덮던 차렵이불을 시작으로 옷걸이와 장롱에 걸려있던 옷을 빨고 널었다. 건조대에 누운 이불과 옷은 장롱이 아닌 가방에 차곡차곡 들어갔다. 화영은 자기 몸집만 한 가방이 채워질수록 이곳에서 지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했다. 진하의 편지를 기다리며 수시로 우편함 안으로 손가락을 뻗었지만 잡히는 건 텅 빈 차가움 뿐이었다.
멈춰야만 보이는 바람개비의 존재처럼 사라진 후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고 없이 이별을 맞이한 사람의 슬픔. 원망이 남기고 간 마음의 재난. 화영은 두려웠다. 자신이 아빠를 미워한 만큼 진하도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까 봐. 겨울보다 혹독한 가을을 보낸 화영은 그동안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안부와 농담을 걷어내고 진심과 진실로 채운 무거운 편지를 진하에게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또다시 이사를 가게 됐다고. 이번만큼은 알려야겠다고. 네가 늦은 답장을 보내면 난 받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빵빵한 입을 다문 커다란 가방 세 개가 정승처럼 현관 앞을 지키던 날, 화영은 우체통에 꽂힌 노란 봉투를 발견했다. 진하였다. ‘너, 진짜 나빴어. 못 됐어!’라고 시작한 편지는 설 연휴를 지나 돌아오는 토요일에 널 보러 오겠다는 말로 마무리하며 끝났다. 화영은 떨리는 손을 맞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식탁 위에 올려진 탁상 달력을 가져다 날짜를 확인했다. ‘1월 31일.’ 화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2월이 되기 전에 진하를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몇 번을 속삭였다.
몇 년 전 추석, 화영은 새로 산 빨간 스웨터를 입고 외갓집이란 곳을 갔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처음 본 사람 앞에서 ‘얘가 걔냐’란 말을 들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그때의 상황을 투덜대니 진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아쳤다.
“명절은 원래 다 그래.”
툭 건네받은 위로 덕분인지 화영은 돌아오는 몇 번의 명절을 씩씩하게 보냈다. 어색하게 뻗은 손으로 평소 못 먹어본 떡과 과일을 종류대로 씹어 삼키며, 이상한 칭찬에 웃지 않는 얼굴로 대답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집에서 보내는 명절도 따분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냥 잠을 더 자고 밥을 좀 더 자주 먹는 날에 불과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불을 싸고 굼벵이처럼 누워 있는 게 처음 본 얼굴들 틈에서 어색하게 과일을 집어 먹는 거보단 나았으니까. 화영은 빨갛게 칠해진 숫자가 어서 흘러가기를 바랐다. 설 연휴가 끝나고 이틀 밤만 더 자면 진하를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