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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이모 Sep 13. 2024

기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5. 


화영은 소위 친아빠라고 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장롱 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앨범을 꺼내보다 우연히 들은 게 전부다. 한쪽 볼에 막대사탕을 물고 풍선을 들고 있는 화영의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아빠였다고. 

엄마는 그렇게 지나가는 말로 아빠의 존재를 화영에게 알렸다. 그저 무심히 허공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화영은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아빠란 사람은 왜 사진을 찍어주기만 하고 같이 찍지는 않았는지. 두꺼운 앨범에 왜 아빠 얼굴이 들어간 사진이 한 장도 꽂혀있지 않는지.     


‘사정이 있겠지.’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떠올랐다. 화영도 그 말을 되뇌며 터져 나오려는 말을 삭혔다. 있었다. 엄마는 기대하던 일들이 어긋나도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겠지.’ 이 한마디로 단념과 포기를 빠르게 택하는 사람이었다. 뾰족한 턱과 코, 각진 안경 너머로 보이는 가느다란 눈매에 서린 차가움을 화영은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 무엇으로도 데워질 것 같지 않은 서늘함이 기대도 희망도 없는 나날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적의 온도란 걸. 


선풍기 머리에 파란 커버를 씌운 날, 화영은 새아빠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거울과 액자를 자주 사 가던, 올 때마다 엄마에게 문구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아저씨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금색 마커로 ‘번창을 기원합니다’란 문구와 날짜를 적은 후 정성스레 거울과 액자를 포장했다. 아저씨가 건넨 돈으로 통닭을 사 먹은 것도 여러 번. 가게에서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친 아저씨가 어느 날 갑자기 아빠라니. 


화영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아저씨는 달랐다. 금이빨을 번쩍이며 아무렇지 않게 화영을 딸이라고 불렀다. 화영은 아빠라는 사람이 생기면 겪게 될 변화가 두렵긴 했지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에게 기대를 품기란 어렵지만,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될 것만 같았다. 아빠가 있는 저녁, 아빠가 있는 여행, 아빠가 있는 발표회만으로 충분할 것이라 기대했다. 생각만으로 알 수 없는 안정감이 따라붙었다.      


화영은 한 달에 한 번 보는 아빠 얘기를 하는 진하를 볼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거제도에서 일하는 아빠가 집으로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산 호두과자를 진하가 줄 때면 화영은 왠지 모르게 샘이 났다. 팥앙금 사이 썩은 호두가 된 것처럼 마음이 쓰고 떫었다. 엄마 같은 할머니와 친아빠가 있는 진하가 부러웠다. 쓰디쓴 마음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엄마와 목욕탕을 가고 엄마가 끓여준 라면을 먹을 때 진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쓰고 떫은 마음이 혼자만의 것은 아닐 거라는 안도감이 화영을 다독였다. 때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비루해질 필요도 있는 거니까.      


화영과 진하는 생각했다. 진하에겐 엄마가, 화영에겐 아빠가 없다는 게 그들을 묶어주는 단단한 끈이었다고. 하지만 화영은 의도치 않게 그 끈을 끊어버렸다.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영은 믿었다. 엄마의 결혼도, 아빠의 존재도 숨길 수밖에 없던 자신의 마음을 진하가 이해해 줄 거라고.


화영의 열다섯 번째 생일날, 화영은 한마디 말도 없이 시장 골목을 떠났다. 진하의 축하도 선물도 받지 못한 채. 화영은 자신이 떠날 걸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한 걸까. 화영은 속이는 것과 숨기는 것의 차이를 알았을 테다. 다른 말로 덮기보다 목젖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게 더 나은 선택인 것을. 깨끗하게 보여줄 날을 바라며 아낀 말은 거짓말이 될 수 없다는 것도. 화영의 엄마도, 진하의 할머니도 같은 마음이었을 테다. 남겨진 사람을 위해, 떠날 사람을 위해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화영에게 새아빠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화영은 아직도 거울과 액자로 빼곡한 가게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하와 함께 목욕탕에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분식집에서 꼬치도 사 먹으며. 어쩌면 빨리 스물다섯이 되고 싶다던 화영의 바람도 옅어졌을 수도. 그랬다면 어땠을까. 화영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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