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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Jul 07. 2021

드디어 세상에 나가다.

취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저녁부터 통증이 왔다.  술과 친구 좋아하는 남편은 초저녁부터 잠이 들었다. 새벽 2시 통증은 점점 심해져서 천장이 빙빙 도는 걸 처음 경험했다. 남편을 흔들 힘이 없었다. 겨우 문을 열고 아이들 방으로 갔다. 잠 귀 밝은 둘째가  문소리를 알아채고 나왔다. "아빠 좀 깨워줘, 엄마 죽을 거 같아" 그리고 잠깐 의식을 잃었다. 어느새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배가 아프다는 내 말에 여기저기 눌러보던 동네의 젊은 의사는 얼른 큰 병원으로 가라 했다. 종합 병원 의사는 배를 한번 만지더니  묻지도 않고 CT에 나를 올려놓았다. 나의 내장이 대형 화면에 훤히 보였다. 소장, 대장이 비었다가 차 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통증은 계속되었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통증만 멈춰준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의사는 내일 아침 첫 번째에 수술할 계획이니 걱정마라고 했다. 진통제가 들어가고 거짓말처럼 통증이 줄었다. 자궁 적출 수술이었다. 염증 수치가 너무 높다고 했다. 이 정도면 평소에도 많이 아팠을 텐데 괜찮았냐고 물었다. 시간이 없어서 그냥 참았다고 했다. 실제로 병원 올 시간이 없던 삶이었다. 의사는 참아서 병을 키웠다고 꾸중을 했다.


수술 후에 체력이 바닥이 나서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어른들이 뱃심으로 서있는다는 말을 실감했다. 퇴원 후 한 달을 시골에서 보냈다. 친정어머니는 애 낳을 때 못한 몸조리 시킨다고 온갖 좋은 약을 지어오셨다. 그리고도 아침저녁으로 온갖 정성을 들인 음식을 해 주셨다. 체력도 회복이 되는 듯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일곱. 문득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살피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았지만 한 달 동안 아이들은 엄마 없이 잘 지냈다. 엄마가 그렇게 필요한 때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한참 중고생 세 명이 있는 집엔 돈이 통장에 머물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나는 구체적인 내 직업 없이 남편 일만 도와주고 있었다. 남편도 혼자 할 수 있었는데 내가 있으니까 의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취업을 결심했다. 젊었을 때 내가 해왔던 일들은 이미 이십여 년이 지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이었고 기능이었다. 곰곰이 나를 따져보니 경력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그냥 중년의 아줌마일 뿐이었다.


여자가 오십이 되면 들어갈 곳이 없다고 하시던 선배들의 말이 생각났다. 화려한 이력과 경력을 가지고도  할 수 없이 식당으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다닌다는 분들을 뵌 적도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당당히 회사를 다니고 싶었다. 웬만한 정보지 광고에는 45세 미만이라고 나이 제한이 있었다.  굳이 그 나이에 취업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라도 취업하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나를 분석해 봤다. 나는 재테크를 잘할 만큼 숫자에 빠르지가 않았다. 그저  들어오는 돈 관리만 잘했다. 따지면 그것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맨날 쓰기에도 빠듯했다. 남편의 수입은 일정하지가 않아서 벽돌 빼기 살림이었다. 잘 들어오면 좀 쌓아 두었다가 돈이 안 들어오면 여기 빼고 저기 빼서 맞추는 살림이었다. 이래저래 적자인 가계부만 탓하는 허송세월을 산 듯했다. 나는 일정한 수입이 간절했고 집안에 앉아 망설이는 나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나의 장점은 어렸을 적 학창 시절의 생활기록부를 근거로 책임감이 강했고 성실과 의리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근처에서 제일 크다는 제빵 회사를 찾아갔다.  45세 미만의 나이만 지원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나이가 많아서 공채로는 지원조차도 할 수 없었다. 아침 6시, 새벽부터 찾아갔다. 생산 공장에 나이가 무슨 소용이냐. 건강하면 되지 싶었다. 나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출근 전이라 부산하게 안내를 준비하던 경비실로 들어섰다. 경비실 귀퉁이에 한참을 앉아 있어도 자기 일에 바빠서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한 시간쯤 지난 후에야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한분이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오셨는데 여기 계시지요?" 나는 다짜고짜 

"여기 취업하고 싶어서 왔어요." 말을 시키던 분께 이력서를 내밀었다. 

부끄럽게도 입학 졸업만 반복되는 이력서였다.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력서를 받더니 찬찬히 읽어 보셨다.

그리고는

"나이가 많으신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요. 나이가 많아서 인터넷으로는 지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오랜 시간 기다렸던 내가 딱 했던지 경비아저씨는 일을 하시던 중간에도 자꾸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그러더니

"인사담당자가 이력서를 보러 오시기로 했으니 잠시  기다리세요." 했다.

한참 뒤에 인사담당을 하신다는 분이 오셨다.

의아하게 쳐다보시던 분에게

취업하고 싶어서 왔노라 횡설 수설  말을 하고 귀가를 했다. 


 쓸쓸하고 불안한 며칠이 지났다. 한 통의 문자가 와 있었다. 생산공장 입사 안내문이었다. 기뻤다.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서 서류를 준비했다. 드디어 직장인이 되었고 나는 세상에 나갔다.


남편은  마누라가  취업한 게 자신의 탓 인양 한동안 우울했다. 마누라의 고집을 꺽지 못한 것도 자신의 탓인 양 안타까워했다. 마누라가 취업 한 회사 근처를 지나가기도 미안해서 돌아서 다닌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길을 나선 것이기에 신이 났다. 하지만 몸은 힘들었다. 보름 가까이 매일 몸살 약을 먹었다. 몸이 힘드니까 마음을 살필 여력도 없었다. 옆 동료의 얼굴도 한 동안 알아보질 못했다.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돌아볼 기력도 없었다.  나는 그냥 일단은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열정을 응원했다. 중 고생이던 아이들이 밤마다 엄마 몸에 파스를 붙이고 뜨거운 물수건을 해 줬다는데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매일 밤을 혹독하게 앓았던 기억만 선명하다.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서서히 몸이 적응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아이들도 보이고 남편도 보였다. 옆 동료와 내게 주어진 일도 보였다.


취업은 나를 당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이 분야의 경력자라는 이력도 만들어 주었다.  눈에 확 띄게 부를 이루어서 성공을 한 것도 아니다. 이름을 크게 날려서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나의 소확행을 즐길 수 있고 세상을 곱게 보는 눈을 가졌으니 이로서 만족한다.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아직도 일을 할 수 있어서 즐겁다. 망설이는 세상의 엄마들에게 말하고 싶다. 세상에 나가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이해하는 폭이 커진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취업은 내 인생을 바꾼 최고의 터닝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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