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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현 Dec 07. 2021

20) 보름달 뜨는 날은 동해안으로

-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2부)

 정말 예쁜 보름달을 보고 싶다면 한 번쯤 동해안으로 가 보면 어떨까?! 아마 평생 동안 기억에 남을 환상적인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추석 대보름날이었다. 전날 야탑에 계신 새미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우리는, 동해에 내 친인척이 모였다는 말에 남쪽으로 향했다. 카페 일을 마치자마자 출발해 외삼촌네 집에 도착하니 오후 6시경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 부모님을 비롯해 온 가족이 앉아 있었다. 내가 "다들 저녁은요?!"라고 묻자, 어머니가 "너네 오기 전에 벌써 먹었지?!"라고 답하셨다. 아직 해가 안 졌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식사를 마친 것이었다. 누나와 이모님들은 우리가 신발끈을 채 풀기도 전에, 얼른 앉아서 밥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친가 집에서 가져온 송편, 두부전, 각종 전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우리가 젓가락을 집어 들고 먹으려 하자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왔다. "새미네 가족 분들은 잘 지내시지?" "이 두부전 오늘 가져온 건데, 두툼하고 맛있으니까 먹어봐." "다 먹고 나면 저녁에 추암 바다 가자. 우리 좀 이따가 다 같이 걸어가기로 했어." 새미는 옆에서 가족들이랑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음식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익숙한 단어가 들려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추암 바다를 간다고?!'


 추암 해수욕장, 그곳은 내게 있어 특별한 장소였다. 어릴 적 동해로 놀러 가면 으레 놀러 가던 곳이 추암이었다. 외할머니 집에서 자동차를 타고 10분 거리에 위치할 정도로 가까웠는데, 특이하게도 입구가 터널이었다. 기찻길 아래 터널을 지나면 눈앞에 백사장과 활짝 트인 바다가 펼쳐졌다. 나는 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곧 있으면 바다에서 뛰어놀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항상 가슴 설레어했다. 해수욕장 왼쪽으로는 촛대바위를 비롯한 바위 무리가 있으며, 오른쪽 언덕에는 하얀 벽지에 파란 지붕으로 된 쏠비치 삼척 예식장이 보였다. 해수욕장은 그 둘을 장승 삼아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수욕장은 그 크기가 아담해서 아직 어린이였던 내 눈에도 전체 모습이 다 담겼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내 테두리 안에 들여놓을 수 있어, 내 바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 사실 추암 해수욕장은 어릴 적 내게 있어 바다 그 자체였다.


 부모님을 포함해 웃어른들은 저녁 먹으면서 약주를 하셔서인지, 술 깨고 산책도 할 겸 바다까지 먼저 걸어갔다. 우리는 둘째 이모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추암으로 향했다. 추암 해수욕장까지는 10분도 안 돼 금방 도착했다. 하지만 추석 연휴이기 때문인지 터널 앞은 자동차가 빽빽이 줄 서 있었다. 도저히 해수욕장 주차장으로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터널 앞 갓길에 주차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해수욕장 주차장을 지나고 해변 앞 건물들을 지나자 눈앞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바다가 보였다. 동시에 그 위로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눈에 들어왔다. 해수면 위로 달의 모습이 비쳤는데, 보는 순간 우리는 말문을 잃었다. 어둠이 자리한 밤, 둥글게 차오른 달이 나 홀로 빛을 발했다. 달빛이 어찌나 밝던지 주위를 환히 비출 정도였다. 사방으로 빛줄기를 내뿜던 보름달이 바로 아래 해수면에도 닿았다. 환한 달빛과 잔잔하게 파도치는 물결이 만나자, 마치 바다 위로 길을 만들어 낸 것만 같았다. 일렁이는 길을 따라 달까지 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백사장에 우두커니 선 채 한동안 달빛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 정도로 해수면에 비친 달빛은 아름다웠다. 

 

'보름달이 저렇게나 밝았구나' 어느 책에서 옛 선조들은 밤길을 다닐 때, 달빛을 등불 삼아 나아간다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웃어른들은 백사장에 앉아 보름달을 벗 삼아 이야기를 나눴다. 명절 인사할 겸 놀러 왔는데, 이렇게 멋진 광경을 볼 줄이야. 가족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왼쪽에 자리한 촛대 바위를 보러 올라갔다. 촛대 바위는 약 50m 정도의 바위산에 자리한 암석이었다. 바다에서 솟아 오른 기암괴석 중 하나인데, 그 모양이 흡사 촛대와 같아 촛대 바위로 불렸다. 그리고 어느 설화에 따르면 추암에 살던 한 남자가 소실을 얻은 뒤 본처와 소실 간의 투기가 심해지자 이에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남겨놓았으며, 이때 혼자 남은 남자의 형상이 촛대바위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행실을 바로잡고 살아야 하는 건 변함없다 보다.

 

 바위 무리에서 한 걸음 떨어져 나온 촛대 바위는, 우뚝 솟아오른 채 자신의 자태를 올곧이 드러냈다. 달빛은 여전히 환하게 비췄다. 아니 시간이 흐르면서 하늘 위로 높게 떠오른 탓인지, 백사장에서 봤을 때보다 바닷빛 길이 더 커진 상태였다. 바위 사이에 낀 보름달 또한 아름다웠다. 추암 바위는 해돋이 명소로 유명한데, 달을 낀 밤경치도 그에 못지않을 것 같았다. 


 삼십여 분 정도 바위 산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내려왔다. 가족들은 여전히 백사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그 자리에 합류했다. 물을 무서워하던 조카 시완이는, 모래 촉감은 마음에 들었는지 이리저리 뛰 돌아다녔다. 매형이 뒤에서 쫓았다. 나도 장난기가 일어서 뒤따라갔다. 다른 사람들은 달빛을 벗 삼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차츰차츰 밤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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