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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현 Dec 09. 2021

22) 고모네 사과 따러 간 날

- 강릉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2부)

“고모~! 여기서부터 시작할까요?!!”

“응 그래, 이 앞에 상자들 가지고 거기서부터 따면 돼.” 

“네! 알겠습니다!”


 지난달 동해의 일가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고모와 고모부를 만났다. 두 분은 평창에서 과수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수확철에 도우러 가고 싶다고 말하자 일손이 생겼다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내가 농사일에 관심을 가진 건 대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봄,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구직 활동을 하는 동시에 시골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다녔었다. 내가 간 곳은 치바현 카나야라는 지역인데, 그중에서도 스무 가구 남짓 사는 자그마한 산속 마을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 편도로 3~4시간 걸리는 장소를 꼬박 1년 이상 다녔다. 친구들은 내게 돈도 들고, 시간도 허비하고, 몸도 고생하는데 대체 무엇이 그렇게 좋냐며 물었다. 전부라고 답했다. 전철 타고 배를 타며 시골을 가는 길도, 매실과 밀감 등의 열매를 따는 일도, 흙냄새를 맡는 것도, 작업하느라 뻘뻘 땀을 흘린 뒤 산바람을 맞는 것도,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산에서 흐르는 자연수에 나가시 소면(회전식 소면)을 만들어 먹은 일도 매 순간이 좋았다. 어쩌면 번번이 떨어지는 구직 활동에 숨통을 트이기 위해 가는 걸지도 몰랐다. 일자리를 구한 후에도 계속해서 농사일을 도우러 갔다. 그때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아서인지, 언젠가 한국에서도 농사일을 도우러 가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고모는 일하러 나가기 전에 냄비 솥에서 푹 삶은 멧돼지 고기를 꺼내 아침상을 차려주셨다. '아니 웬 멧돼지예요?!'라고 물으니. 며칠 전 고모네 농장을 침입하다 덫에 걸린 멧돼지라 했다. 엽사를 불러 잡았다는데, 사과 농장을 침입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멧돼지가 도심이나, 사람이 사는 동네까지 내려온다는 소식은 뉴스로만 전해 들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사람과 동물 간의 생활권이 나날이 겹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멧돼지 고기는 황기를 넣고 삶은 덕분에 비린 냄새 없이 부드러웠다. 맛있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 사과까지 먹은 우리는, 한 시간여 쉬면서 소화한 다음 농장으로 향했다. 과수원까지는 10분 정도 걸렸는데, 평지가 아닌 비탈진 산길에 자리했다. 과수원에 도착하자 눈앞에 수백 그루의 사과나무가 서 있었다. 높이는 3~4미터 정도 되었을까?! 주먹만 한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이 신기했다. 지척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손을 뻗으면 대부분의 사과를 딸 수 있어 보였다. 아마 사람 손이 닿는 높이에서 성장을 멈추게 하고, 열매를 키운 것 아니었을까? 날씨가 화창한 덕분에 새빨갛게 영근 사과가 탐스러워 보였다. 


 본격적으로 사과 수확을 시작했다. 일본에서 농촌 봉사 활동을 하면서 벼, 오오마사리(대형 땅콩), 잠두콩, 밀감, 매실, 토마토, 머스캣 등의 작물을 직접 따 봤다. 사과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따는 작업이 보기보다 어려웠다. 사과를 쥔 채로 무심코 손목을 비틀면 꼭지가 빠진 채로 떼어 나왔다. 꼭지 없는 사과는 꼭지가 있는 사과에 비해 수분 손실률이 높다 한다. 수분 손실률이 높으면 사과가 빨리 마르는데, 상품 가치가 없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래서 사과를 딸 때는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뽑아야 했다. 사과를 쥐고 천천히 손목을 돌려가며 조심스레 나무에서 떼 냈다.


 똑! 하고 잎이 달린 채로 사과가 뽑혔다. 좋았어! 오른손으로 전해지는 사과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개당 200~300g은 되었는데, 가느다란 꼭지 하나에 기대어 버틴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눈앞에서 직접 못 봤다면, 믿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종이박스 안에 담긴 사과만 봤었지, 나무에서 직접 따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말이다.  


 점심시간까지 쉬지 않고 사과를 땄다. 사과 상자 20여 개 정도 사과를 담자 고모부께서 슬슬 점심을 먹자 하셨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과수원 입구 옆 컨테이너까지 천천히 올라갔다. 컨테이너 안은 널찍했다. 그곳에는 냉장고와 컵라면, 휴지, 담요 등 먹거리와 쉴 공간이 있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컨테이너 안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오오 고모네는 이렇게 쉴 자리를 마련해 놓으셨구나. 라면도 있고, 잠 잘 공간까지 있으면 일하다가 피로해질 때라든지, 폭설이나 소나기가 왔을 때 피난처로도 쓸 수 있겠어.' 3분이 지났다. 왼손으로 컵라면을 들고 김치와 곁들여서 먹으려는 찰나, 옆에 우뚝 서 있는 새미가 보였다. 새미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서 있었다. 쉬지도 않고 일해서 힘들었겠구나 싶어, 일어서서 면발을 새미에게 가져가 보았다. 하지만 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지금은 배 안 고파.” 그럴 리가 있나. 한사코 안 먹으려는 새미를 향해 자꾸 재촉하자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래. 먹을게 안 넘어가.”라고 말했다. 그제야 새미의 눈빛이 멍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아,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적당 적당 하게 일하는 나와 달리, 새미는 무슨 일이든 한 번 시작하면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소진하는 스타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사과 따기가 그토록 신이 났다 보다. 오전에 나보다 더 빨리 사과를 딸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에너지가 바닥날 때까지 쏟아부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컨테이너 안에 들어와서도, 앉지도 못하고 줄곧 서 있었던 거였구나. 너무 힘든 나머지, 앉아서 쉬지도, 음식을 먹을 여유도 없었던 거였다. 마음 같아서는 누워서 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오후 작업을 위해서라도 지금 배를 채워놓아야 했다. 한사코 손사래 치는 새미를 달랜 후 한 젓갈 한 젓갈 국물까지 먹였다.


 쉬지 않고 일한 오전과 달리 오후는 우리 페이스에 맞춰 사과를 땄다.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나누며 천천히 작업하자 새미도 한결 편해졌는지, 다시 웃음을 띄었다. 사과를 든 채 앙증맞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과수원 직원처럼 포즈도 찍어보고, 산을 배경으로 한 모습도 찍으며 여유롭게 일했다. 군데군데 사과를 파 먹는 말벌을 피해 조심스레 사과를 탈취하기도 했다. 한 번은 사과 4 상자를 무리하게 옮기다 그만 수레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나도 함께 넘어졌지만, 아픔보다는 사과에 흠이 가지 않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오후 4시 반을 넘자 외출하셨던 고모부가 돌아오셨다. 조금씩이지만 해도 저물어 갔다. 트럭 위에 상자를 쌓았다. 다 합쳐서 58박스, 신기록이란다. 두 분께서는 하루에 이토록 많은 사과를 딴 적이 없었다며 기뻐하셨다.  


 트럭을 타고 고모네 집으로 돌아갔다. 집 마당에 사과 상자를 내려놓자 6시가 가까워졌다. 해가 거의 다 저물고 어둑어둑 해져 갔다. 두 분은 길도 어두워질 텐데 하룻밤 자고 가라고 말하셨지만, 다음날 아침에 카페로 출근해야 했다. 어렵다고 말씀드리는 대신 마음만 받았다. 고모님은 하루 종일 고생했다며 사과를 세 봉지에 가득 담아 싸주셨다. 그 외에 멧돼지 고기와 여러 반찬도 봉지에 담아 주셨다. 감사하고 말씀드리며 차에 탔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에는 왠지 모르게 충만했다. 오늘 하루 열심히 일했다는 것 때문이겠지. 평창에서 집까지는 2시간 여 걸릴 예정이었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저물어 길이 어둑어둑해졌다. 조심조심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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