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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Apr 04. 2021

결국 단발머리

단벌머리 덕후

 몇 년 전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를 즐겨 보았다. 1988년도의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들의 촌스러운 스타일을 보니 내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특히 여자 주인공인 성덕선의 헤어스타일을 보자마자 나는 반가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저건 내 중학생 때 머린데?’

칠흑 같은 검은색, 귀 밑 3cm 길이, 살짝 웨이브 지게 넘겨진 앞머리.


성덕선의 머리와 내 머리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생머리와 곱슬머리라는 점이다. 덕선이는 깔끔한 단발, 난 부스스한 단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날씨는 비가 올랑 말랑한 습기 많은 날씨다. 그런 날이면 내 머리카락이 먼저 알아챈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존재를 뽐내며 제각각 웨이브 춤을 추기 시작한다. 급기야 내 정수리 주변에는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어질러져 있다.

‘누가 내 머리 건드렸나?’,  ‘내 머리숱이 원래 이리 많았나?’  

자주 마주치는 상황이지만 어디론가 숨고 싶은 상황이기도 하다. 곱슬머리와 단발머리의 조합은 나를 자주 시험에 빠뜨렸다.

‘수능 끝나기만 해 봐라. 난 절대 단발머리 안 하고 예쁘게 허리까지 머리 기르고 다닐 거야.’

 청순가련 여주인공 같은  모습을 기대하며 스무 살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난 드디어 스무 살이 되어 원하는 대로 어깨 아래까지 내려간 긴 머리를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생 이후로 이렇게 길러본 적은 처음이라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대학생이 된 기념으로 처음으로 ‘매직’이라는 펌을 했다. 이 펌은 제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평평하고 뜨거운 고데기가 몇 번 내 머리카락을 스치더니 그들의 모양이 매직처럼 바뀌어 있었다. 제멋대로 춤추던 녀석들은 어느새 줄 맞춰 행진하는 군인들처럼 변했다. ‘모두 똑바로 선다.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라고 다그치는 장교라도 있었던 걸까? 한 올 한 올 정갈하게 곧게 뻗어간 내 머리카락은 어느새 드라마 속에서 보았던 여주인공과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얼굴에선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헤어스타일 하나만이라도 이렇게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3 친구도 나를 보더니 놀라기 시작했다.

“너 정말 내가 알던 김미연 맞아?”

“응 맞아. 나 김미연이야.”

“머리 기르니깐 달라 보인다.”

친구의 반응도 이해가 됐다. 친구가 봐왔던 내 모습은 시골에서 막 상경한 촌스러운 소녀였고 지금은 세련된 서울 여자로 변신했으니.


그렇게 난 일 년 동안 실컷 머리를 다 21살에 다시 단발로 돌아왔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때의 헤어스타일과는 달랐다. 일명 ‘뽕’이라고 정수리 부분에 힘을 잔뜩 주고 밑으로 뻗은 머리는 귀 안쪽으로 우아하게 말았다. 일명 아나운서 머리를 했다. 아나운서의 지적이고 우아한 머리가 예뻐 보였다. 고등학생 때 꿈이었던 아나운서가 된 마냥 내 어깨에도 덩달아 뽕이 들어갔다.


  20대를 거쳐 30대가 되어서도 머리를 기르고 자르는 일은 반복되었다. 머리를 기를 것인가 자를 것인가는 여자의 평생 고민이라고 했던가? 녹색창에 여자 연예인들 기사가 나와도 난 그녀들의 헤어스타일에 먼저 눈길이 갔다. 아이를 낳고도 머리숱이 풍성하고 탐스럽게 긴 고소영의 머리를 보고 있으면 ‘나도 머리를 길러볼까?’ 하다가도 시크하고 활동적이게 보이는 단발머리의 대명사 고준희의 머리를 보고 있자면 ‘그냥 확 자를까?’를 반복했다.


  결국 난 긴 머리를 몇 개월 가량 유지하다 다시 단발머리로 돌아오곤 했다. 내 머리 지분을 굳이 나눈다면 단발머리 9, 긴 머리 1이다. 내가 생각하는 긴 머리는 어깨만 살짝 넘어선 머리부터 포함이다. 예전에 느꼈던 단발과 곱슬머리의 불협 화음은 이제 내게 일어나지 않는다. 미용계에서는 '볼륨매직'이라는 대기술이 발달했고 세팅펌, 러플펌, 히피펌 등 단발에 어울리는 다양한 펌들이 등장했다.


  내가 단발머리를 고수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긴 머리를 관리하기 힘들어서다. 어깨만 넘어가도 항상 묶기 바빴고 특히 여름에는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면 목덜미에 머리카락이 달라붙는 그 느낌이 싫었다. 그리고 잦은 펌과 염색으로 머리 감은 후에 빠진 머리카락을 보며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다가 나 대머리 되는 거 아니야?'라고. 그리고 단발머리를 한 나를 보면 생기 있고 개성 있어 보였다. 내 안의 나약함이 단발머리가 다 감춰주는 것처럼 짧은 머리는 나에게 설명할 수 없는 자신감을 줬다.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어른이 되라고.


  석 달 전 어깨에 달랑 말랑한 머리 길이에서 귀밑 3cm 칼 단발로 싹둑 잘랐다. 인스타에 찾아보니 요즘 칼 단발이 유행이란다. 옛날에는 촌스러워 보였는데 지금은 왜 이리 세련되 보이는 걸까? 유행은 돌고 돈다던데 정말 그런 걸까? 그렇게 난 25년 만에 다시 성덕선 머리가 되었다. 남편은 내 머리를 보더니 어디서 중학생 머리를 하고 왔냐고 뭐라 한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난 단발머리 덕후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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