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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자라는알라씨 Apr 08. 2021

덕질에는 나이가 없다

40대의  행복한 덕질 생활

3년 전 연구실에서 한 동료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머~ 선생님 오늘 너무 예쁘게 하고 오셨네요.”

내가 말했다.

“나 오늘 정말 바쁜 날이에요. 퇴근하고 서울까지 가야 해요.”

내가 다닌 학교는 수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까지는 한 시간 이상 가야 했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 지현우 시사회 가요.”

“네? 지현우요?"

뜻밖의 대답에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시사회까지 가실 정도로 팬이세요?”

“나 팬 된 지 꽤 됐어요. 팬미팅, 뮤지컬, 영화 시사회 하면 웬만하면 다 가요.”

그렇다. 그 선생님은 지현우에 진심이었다. '지현우' 얘기할 때마다 반짝거리는 눈과 입가에 떠나지 않는 미소를 보고 바로 알아버렸다. 선생님은 지현우 찐팬(진짜 팬)이라는 것을.


 내가 선생님의 대답을 듣고 놀란 이유는 그 선생님의 나이가 50이셨다. 보통 시사회까지 찾아가는 팬들은 10~20대의 젊은 연령층이 대부분일 거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다. 시사회까지 갈 정도로 열정이 있다는 게 부러웠고 그런 열정을 가진 선생님이 대단해 보였다. 30대였던 나는 연예인을 좋아하는 덕질은 민망한 거라 여기며 애써 숨겨왔었다. 그동안 '덕질을 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선생님의 대답에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겼다. 순간 나도 모르게 덕밍 아웃(한 분야에 덕후인 것을 알리는 것)을 해버렸다.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한 대상을 입 밖으로 얘기한 날이.


“사실 전 뉴이스트 팬이에요.”

“뉴이스트? 알아요. 프듀에 나왔잖아요.”

“네 맞아요.”


세상에 이렇게 말이 잘 통하시는 분이었다니. 보통 내 또래인 30~40대 분들에게 아이돌 이름을 대면 다들 “누구예요?”라는 대답이 일반적이다. 그러면 나도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

나를 한심하게 볼까 봐. 나잇값 못한다고 생각할까 봐.


  내가 ‘뉴이스트’란 그룹을 알게 된 건 2017년에 방송된 ‘프로듀스 101’이란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그 프로그램은 10~20대들의 파릇파릇한 아이돌 연습생들이 서로 경쟁을 통해 최종 11명을 선발해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시키는 게 목적이다. 중학교 시절 H.O.T. 를 좋아한 이후로 아이돌 세계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다른 세상, 어딘가 쯤에 존재하는 환상 속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두었지 환상 속 세상에는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당시 나는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 휴직 중이었다. 거의 3년 동안 집에서 애만 키우다 보니 예전 내게서 찾을 수 있었던 생기도, 에너지도 어느새 바닥이 났음을 느꼈다. 이런 내가 점점 싫었고 우울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때 이 프로그램 속에서 자기 꿈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는 젊은 친구들이 보였다. 아~ 세상엔 이런 세계도 있구나. 이들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내속에 죽어있던 세포에 생명력이 불어져 하나하나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도 생기 있던 예전의 나로 점점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뉴이스트’는 데뷔 6년 차 그룹으로 소개됐다. 데뷔한 지 6년이 된 이들이 다시 아이돌 연습생 신분으로 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들은 그동안 많은 음반을 발매했지만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매년 쏟아져 나오는 다른 아이돌 그룹에 밀려 점점 묻혀 갔다. 6년의 경력을 리셋하고 다시 출발점에 선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예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5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수능 준비를 하던 그때 내 모습. 내가 느낀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아'하는 절박한 심정을 그들에게서 느꼈다. 그렇게 난 뉴이스트에게 점점 스며들었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구석 1열에서 열심히 응원하는 팬이 되었다.


  어제 임영웅에 대한 무한 팬심을 선보인 할머니 사연이 TV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었다는 기사를 봤다. 할머니는 어려운 시기 임영웅 노래를 듣고 큰 위로를 받아 잃었던 웃음을 되찾으셨다고 한다. 임영웅 굿즈를 300개 이상을 갖고 있고 임영웅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고 하니 덕질 생활은 나이에 상관없다는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도 40대가 된 지금 당당하게 덕밍 아웃을 한다. 그랬더니 예상치 못한 반응들이 돌아온다.


“전 뉴이스트란 그룹을 좋아해요.”라고 내가 먼저 운을 뗐다.

“그래요? 전 BTS 좋아하는데, 지민이 너무 귀여운 것 같아요. 콘서트 가고 싶은데 표를 구할 수가 있어야죠.”

“저도 BTS 좋아해요. 나 딸이랑 맨날 음악 듣잖아.”

  

 혹자는 '가족에게 사랑을 못 받아서 연예인에게 애정을 쏟는 거 아니냐', '그 나이에 연예인을 좋아하다니 한심하다' 등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연예인을 좋아하는 일은 가족에게 쏟는 애정과는 또 다른 차원의 기쁨이다. 그때만큼은 다 큰 어른도 아니요, 누군가의 엄마도 아닌 그야말로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던 어린 소녀로 나를 되돌려 놓는다. 바쁜 일정 속에서 짬을 내 마신 커피 한 잔에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덕질은 빡빡하게 돌아가는 생활 속에서 부드러운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며 내게 기쁨을 주고 있다.


  아마도 우린 모두 마음 깊은 구석 어딘가에 소년, 소녀 시절에  품었던 '동경의 대상'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그 상자의 문을 30대 이전에 닫아 버린다. 일에 치여서, 가족에 치여서, 삶에 치여서란 이유로. 일부는 그 상자를 활짝 열어 마음껏 표현하고, 누군가는 누가 볼까 두려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한다. 동경의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부끄러운 게 아니며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전 세대에 아우르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내 버킷 리스트에는 ‘뉴이스트 콘서트 가기’와  아이들이 십 대로 성장했을 때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함께 관람하기’가 적혀있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난 오늘도 열심히 덕질 중이다.



(사진출처: 디스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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