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평가에서 최상위 등급을 받지 못했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꽃은 핀다

by 달콤달달

오후 6시. 그것도 금요일 오후 6시다. 평소같으면 터져나오는 '야호!'를 속으로 삼키고 3옥타브는 높은 목소리로 밝고 경쾌하게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하며 사무실을 나섰을 거다. 그런데 책상이 무슨 헤어진 전 남자 친구라도 되는 듯 미련이 남아 좀처럼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금방 전에 받은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Web발신]
2022. 성과급 지급등급 알림
지급등급 : ㅁ
이의신청(총무과) : 3.25. ~ 4.1.

공무원들은 1년에 한 번 전년도 성과를 S, A, B, C. 4개의 등급으로 나누어 평가를 받고 등급에 따라 상여금을 지급받게 되는데 그 결과를 알려주는 문자였다. 작년에도 본부에서 그것도 주요 부서에서 열심히 했다고 자부하는 만큼 결과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보통 승진을 하면 한 단계 아래 등급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나 승진은 올 2월에 했으니 작년 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니 최상위 등급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나의 기대였을 뿐 통보된 결과는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잘못 봤나? 아니면 담당자가 문자를 잘못 보냈나? 문자를 보고 또 보았지만 성과 평가 등급은 이미 엎질러진 물일 뿐이었다.


돈도 돈인데 자존심이 상했다. 올 해부터 평가 방식이 바뀌어 일반행정 8-9급을 통틀어 8명만 최상위 등급을 받을 수 있었는데 8-9급 인원수 대비 적은 숫자는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8-9급을 일렬로 줄 세웠을 때 8등 안에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니 지난 1년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물론 나 말고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의신청이라도 해볼까? 짧게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불현듯 동화 <인어 공주>에서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준 사람은 이웃 나라 공주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지 못한 인어 공주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알 것 같았다. 인어공주는 말하지 않아도 왕자가 알아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결국 왕자는 인어 공주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웃나라 공주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어쩌면 왕자는 인어 공주가 자신을 구해준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인어 공주와 결혼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고마운 마음과 사랑은 다르지 않은가! 회사 또한 내가 일을 열심히, 잘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최상위 등급을 부여한 것뿐이다.


어릴 적 동화를 읽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인어 공주가 너무 안타깝고 불쌍하기만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인어 공주가 왕자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한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애초에 인어 공주가 사랑을 얻기 위해 왕자를 구한 것이 아니 듯 나 또한 성과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애쓰며 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 마음이 너덜너덜할지언정 이의신청을 제기하지는 말자고. 그저 최상위 등급을 받은 동료들의 고생을 인정하고 한 발 물러나는 것이 순리인 듯싶다. 나는 나를 객관화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고 자신에게 관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이의 신청을 함으로써 인사 업무를 맡고 있는 동료에게 일거리 하나를 더 얹어주기는 싫다.


공무원의 일이라는 게 수치로 성과를 나타내기가 어렵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여럿이라면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티가 날 테지만 본부에서는 모두 각자 고유한 업무를 맡고 있으므로 A 업무가 B 업무보다 월등히 어려운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업무 성과를 객관화할 수 없으니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 최상위 등급을 줄 수 있는 직원은 정해져 있고 고생하는 직원은 많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작년에 못 챙긴 사람도 챙겨야 했을 것이다. 이의 신청 기간이 종료되면 인사 업무 규정에 따라 최상위 등급을 받은 사람들을 공개하도록 되어있다. 부디 공개된 명단을 보았을 때 누구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며 수긍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으로만 꽉 차 있기를 고대할 뿐이다.


금요일에는 태풍 수준의 강풍이 제주 전역을 뒤흔들었다. 창문이 흔들렸고 창 밖의 나무들은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휘청거렸다. 비까지 내려 퇴근하는 발걸음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집에 와 매운 라면 하나 끓여 쓰린 속을 달랬다. 술이라도 한잔 하면 더 좋았겠지만 우울한 마음에 술은 독이 될 게 뻔했다. 다음 날인 토요일에는 일직 근무 당번이라서 평일처럼 아침에 출근길을 나섰는데 샛길로 운전하며 가다 보니 벚꽃나무에 꽃이 어느새 활짝 피어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지난밤사이 불어댄 바람과 내린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는 더 많은 봉오리를 틔워 가지의 끝마다 꽃잎을 피어나게했다. 비바람이 불어대는 것은 비바람의 일이고, 꽃을 피우는 것이 나무 저의 일이라는 듯 의연하게도 말이다. 회사가 성과 등급으로 내 마음을 이리저리 휘저을지라도 나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깨달음이 마음에 와닿았다, 꽃잎이 툭 떨어지듯 무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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