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체 가족
원래도 다정한 아이가 한층 더 다감해졌다. 유치원에 가기 전 뽀뽀는 최소 3번, 현관 앞까지 갔다가 포옹을 깜빡했다며 다시 내 품으로 파고들기를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집을 나선다. 하원 후에도 껌딱지처럼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연신 엄마! 하고 불러댄다. ‘오늘은 엄마가 양치해주라.’ 하고 엄마 손을 그리워하고 ‘엄마가 나 좀 재워주면 안 될까?‘ 하며 엄마 온기를 느끼고 싶어 하는 날이 늘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나는 어쩐지 짠하다.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지금 엄마인 내게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강력하게 어필하는 중이다. 일곱 살 인생 중 처음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고 귀여운 침입자로부터.
동생이 생겼을 때 첫째들의 심리 상태는 어른들 세계로 말하면 첩을 데리고 들어온 남편을 본 조강지처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동생을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은 흡사 첩을 껴안고 있는 남편을 본 충격과 비슷할 터. 첫째와 둘째의 첫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다. 다행히 코로나 이후 보호자인 남편 외에는 병실 출입이나 신생아와 직접 대면이 불가능했다. 첫째는 신생아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동생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첫만남으로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아이는 만져볼 수 없는 동생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어색해하면서도 잠든 갓난쟁이에게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눈 좀 떠보라며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도 해보았지만 이제 세상 살이 1일 차인 신생아는 하루 종일 먹고 자는 게 제 할 일 인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자기 몫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다. 부디 동생이라는 존재를 엄마 품을 꿰차고 앉을 얄미운 녀석쯤이 아닌 사랑으로 돌봐주어야 할 작고 소중한 생명체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끝내 아가와 눈 맞춤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아이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아이의 머리가 내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몸이 자랐다. 마음은 얼만큼 자랐을까? 눈에 보이면 좋을 텐데.
나는 둘째이자 막내라서 동생이 있는 삶을 알지 못한다. 마냥 사랑스러울지, 돌봐야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일지.(대신 오빠가 있는 삶이라면 할 말이 아주 많다) 그리고 어릴 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엄마가 오빠를 훨씬 편애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오빠는 무슨 얘기냐며, 본인이야말로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나)때문에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혼나기도 더 많이 혼났다고 주장한다. 한편 엄마는 우리 둘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가락을 깨물면 똑같이 아프지 더 아프고 덜 아픈 게 어딨냐고, 본인이 모지리들을(모자란 아이들) 낳아서 키웠노라고 노여워하신다.
사랑을 준 사람은 똑같이 나눠줬다는데(아이 둘을 직접 낳아본 바, 이 말은 참이다) 받은 사람들은 서로가 덜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지혜의 왕 솔로몬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게 마음의 일이라 크기를 잴 수도, 무게를 달 수도 없으니 말이다.(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엄마가 오빠를 더 사랑함에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첫째의 고달픔을 하루아침에 맏이가 된 아이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일곱 살은 아직 자신의 몸과 힘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서 첫째와 둘째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나의 긴장감은 높아진다. 악의 없는 첫째의 몸짓이 의도치 않게 둘째를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갓난쟁이를 보호하려다 동생만 예뻐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어 첫째의 행동들에 의연하고 태연하게 대처해야겠다고 출산 전부터 마인드 컨트롤을 해왔으나 현실 육아 앞에서는 말짱 도루묵이다. 나오는 말은 다급하고 목소리는 날카롭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엄마의 표정, 목소리에 묻어나는 예민함을 모를 리 없는 아이는 시든 꽃처럼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군다. 눈물 한 방울이 눈 끝에 매달려 툭, 하고 떨어져 내릴 것만 같더니 금세 줄기를 이루어 복숭아 같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자고 있는 동생의 볼을 쓰다듬고, 발을 만지고, 이유 없는 울음에 슬쩍 다가와 가슴을 토닥여주려 한 것뿐인데 엄마의 섣부른 걱정이 아이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고만 것이다. 첫째도 이제야 일곱 살일 뿐인데, 동생이 생겼다고 갑자기 다 큰 아이 노릇을 할 수는 없는 것을. 아이를 품에 안고 정중히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봄햇살보다 밝고 봄바람보다 보드라운 둘째가 배시시 웃는다. 예쁘기도 하지, 속도 없이.
아이를 키우는 건 시간이 지난다고 익숙해지는 과정이 아니다. 첫째를 키워봤다고 해서 그 경험치가 둘째에게도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첫째와 둘째가 성별부터 다르니 아이 둘을 키우는 건 매일이 처음이고 매 순간이 새롭다. 첫째가 둘째에게 질투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감정의 실체가 생각보다 뚜렷해 놀라곤 한다. 갓난쟁이를 위해 마련한 바운서나 쿠션에 커다래진 몸을 구겨 넣고, 오른팔에 아기를 안고 있으면 왼쪽 품을 파고들며 아기 흉내를 내는 모습은 당황스럽기도 하다. 육아의 세계는 왜 여전히 어렵고 우아하지 않으며 서투름만 쌓여가는가! 그럼에도 세 가족이면 충분하다 여기며 지내왔던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네 가족이 되어 느끼는 행복은 신선하다.
오빠를 향한 아기의 배냇짓에 "엄마, 별이가 웃었어!", 달님보다 다정한 웃음을 띠고 동생을 바라보며 아이가 했던 말이 오래 가슴에 남을 것 같다.
- 엄마 별이가 우리한테로 와서 이제 우리 가족이 완전체가 되었어!
첫째야, 우리 집에 찾아온 작고 귀여운 침입자를 반갑게 맞이해 주고 사랑해 주어서 고마워.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엄마 아빠 곁을 떠나가기 전까지 너희들의 세계가 완전하고 안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