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승무원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


나는 브런치에서 승무원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에서 글을 쓴지도 이제 곧 2년이 된다.


나의 이전 글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의 대부분의 글의 내용은 승무원에 대한 예찬 가까운 글들이 많다. 그렇게까지 좋은 직업은 아닌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사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나에게 가난이 찾아온 건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이층짜리 건물에 지하까지 있는 큰 유치원을 운영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다양한 교육을 받으면 풍족한 생활을 보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 또한 자연스럽게 유치원 원장님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장래희망란엔 유치원 원장님이라는 여섯 글자가 적혔다. 그러던 중 여러 이유로 부모님이 유치원을 정리하셔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 당시 시세 5억 원 정도로 유치원을 파셨고, 그 돈을 아는 분의 소개로 땅에 투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부모님의 전재산을 투자해서 산 그 땅은 그린벨트로 묶였고,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가난이 찾아왔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빨간딱지들이 집안 곳곳에 붙여지고, 우리가 살 집조차 없어졌다. 그게 내 나이 18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유치원 원장님이라는 나의 꿈도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고3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 청소담당이었던 나는 열심히 선생님들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선생님께서 나에게

"OO 이는 키도 크고, 잘 웃으니깐 승무원 하면 잘 어울리겠다."

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가난해졌고, 나는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승무원을 꿈꾸게 되었다.


버스 탈 돈도 없었던 시절.

십 원짜리를 모아 학교 갈 차비를 만들었다.

부모님은 가난한 상황에서도 나의 면접복장을 준비해주셨고, 나는 최선을 다해 면접에 임했다.

그렇게 항공과에 지원하게 되었고, 감사하게 합격하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는 내 학비와 생활비 모두 내가 벌어 충당했다.

생계를 위해 유치원 이사장님이시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근무를 하셨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다. 오빠는 군대에 갔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버지와 함께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가난했던 승무원 준비생 시절.

아침 6시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점심때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음식 배달 콜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을 줄여 돈을 벌고 학업을 병행했다.

가난했던 시절을 아버지와 내가 고스란히 지나왔다. 그래서 나와 아버지의 사이는 더욱 애틋했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내가 꽃게를 싸게 판다는 트럭 아저씨의 방송을 듣고 거금 만원을 내고 꽃게를 사 와서 된장을 풀어 꽃게탕을 끓였다.

사실 아버지와 나는 꽃게를 좋아했다.

꽤 오랜 기간 친척인 준 김치와 밥만 먹은 아버지와 내가 오랜만에 꽃게탕을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다.

드디어 완성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꽃게 몇 마리만 떠있는 멀건 꽃게탕을 한술 떴다.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눈물이 왈칵 났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딸아. 꽃게탕을 정말 맛있게 끓였구나."


"맛있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맛있어요. 아빠."


아버지도 나도 같은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이 억울하기도 하고, 처참하기도 했으며 힘이 들었다. 그래도 가난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오롯이 감당하는 수밖에.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서로의 눈물이 들킬까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 매미가 울던 여름날 작은 월세방에 하얀 식탁보가 깔린 식탁과 꽃게만 떠 있던 눈물과 함께 먹은 꽃게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승무원이 되어야만 했다.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서는 내가 승무원이 되어야 했다.


승무원 면접을 간절히 기다리던 어느 날.

드디어 내가 원하던 항공사의 공채가 났다.

나는 친구와 같이 이대에 가서 이만 원짜리 하얀 난방을 샀다. 그리고 학교에 갈 때 입었던 정장치마를 드라이클리닝 하고 6cm 하이힐을 광이 나게 닦았다.


드디어 면접날이 찾아왔다.

면접관님은 승무원의 자질과 나를 뽑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물으셨고, 나는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답변을 했다.

떨렸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간절했기에 눈에서 나를 뽑아달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며칠이 지나고, 허름한 월세집에서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떨리는 마음으로 한 번의 심호흡을 하고 합격자 조회 버튼을 눌렀다. 꼭 감은 눈을 서서히 뜨자 내 두 눈엔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내가 "꺅" 소리를 지르자 부모님이 깜짝 놀라 다가오셨고, 승무원이 되었다고 울면서 말하자 부모님은 함께 우시며 나를 꼭 안아주시고 축하의 말을 전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꿈꾸던 승무원이 되었다.


처음 회사에 출근하던 날 나는 다짐했다.

'보은 하겠다.'

인생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나의 손을 잡아준 고마운 회사에게 내가 좋은 승무원이 되어 꼭 보은 하겠다고 다짐했고, 12년이 지난 지금도 그 초심을 지키며 비행하고 있다.


처음 한 달 동안 비행하고 들어온 월급이 통장에 찍힌 날. 3개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아본 월급 모두 해서 몇십만 원이었는데, 비행을 하고 받은 월급은 몇백 단위의 월급이 찍힌 것을 보고 나는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렇게 비행을 한 월급은 고스란히 빚을 갚는데 들어갔다. 통장을 스치는 월급을 가끔을 잡아두어 고생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갔다. 가난해진 이후로 꿈꿔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었다. 내가 중심이 잡히자, 가족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새로운 직업을 얻으셨고, 오빠도 더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가난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가난했던 시절.

늘 다짐했던 문구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심은
나에게 있는
날개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나는 그렇게 내가 간절하게 꿈꾸던 승무원이라는 날개를 통해 벼랑 끝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난 승무원이라는 나의 직업이 참 소중하고, 감사하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힘든 부분이 많은 직업이지만 지난 12년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만둬야지라는 말을 해본 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승객에게 건네는 물 한잔에서 정성을 담았다. 내가 우리 회사를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매 비행 임했다. 그것이 어려운 시절 나의 손을 잡아준 고마원 회사에 보은 하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초심을 지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비행 내내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던 팀 선배와 진급 연도 때 나의 칭송 레터를 가로채 선배를 챙겨주던 팀장님을 뒷모습을 보았던 순간 이 세계가 쉽지 않다는 건 이미 깨달았다. 그 이후도 해외 체류지에서 팀장님과 삼시 세 끼 식사와 쇼핑몰을 쫓아다니며 의전을 하지 않으면 비행기 안에서도 가장 힘든 세일즈 듀티(면세품 판매 담당 업무) 혹은 밀 체크 듀티(승객들의 식사를 체크하는 업무)를 고정으로 시키는 블랙리스트 팀장님과도 1년 동안 지옥 같은 팀 생활을 해야 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선배를 대하는 부담스러움과 나보다 나이 많은 후배를 대하는 어려움 또한 겪었다. 그 와중에 진상 승객을 만났을 때 컴플레인 없이 지나가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내가 겪은 승무원의 세계는 승객인 외부고객과 동료인 내부 고객과의 관계에서 오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곳이었다. 처음에 울기도 울었고, 극도의 스트레스로 먹은걸 다 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기면서 달관의 자세가 찾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상한 사람과 비행했을 때도 나를 지키며 비행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웬만한 상황 아니고서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극한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이코노미 클래스, 비즈니스 클래스를 거쳐 퍼스트 클래스까지 일 잘하는 승무원이 되기 위해 스킬업을 해야만 한다. 또한 진급을 위해 한 달에 며칠 없는 데이 오프 때는 영어 업그레이드를 위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독서실에서 토익스피킹과 토익을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방송 상위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방송교육을 가거나 해외에 나가서도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비행 중 찾아오는 이례상황을 해결해야 하기도 하며, 시차 적응을 위해 노력을 해야 했으며, 건강하게 비행하기 위해서 운동 또한 꾸준히 해야만 했다. 승무원이 힘든 직업인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했다. 지혜롭고 현명하게 이 모든 걸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기도와 고민 끝에 늘 좋은 답이 있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12년을 비행하면서 잊지 못할 좋은 분들은 많이 만났다. 그분들을 모델링하며 나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 답을 찾았다.


그리고 12년의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 계발을 했다. 영어자격을 따고, 방송 자격을 따고 진급시기에 맞춰 진급을 했다. 힘들게 힘들게 진급을 하고 나니 비행에서 나를 그 직급에 맞게 대우해주셨다. 내가 직급이 높아지니 괴롭히는 선배를 만날 일이 적어졌고, 베테랑이 되니 비행기에서 혼 날일이 없어졌다. 그렇게 눈물 섞인 12년의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소리 없이 성장해있었다.


'딱 좋다.'

어려운 모든 시기를 지나온 지금 드는 생각이다.

전 세계를 여행하러 출근하는 일상과 많은 월급 그리고 승무원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혜택을 받고 있는 지금이 참 좋다. 그래서 나의 글에는 승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 가득한 글들이 많다.


우연히 봤지만 잊히지 않는 글귀가 있다.


운명은 우연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다.


사실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가난이라는 것을.

가족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지만 어렵게 어렵게 가난에서 벗어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에게 우연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 운명이 나를 이렇게 만들기 위해서 찾아온 건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다는 건 천운이라는 구절을 읽은 적 있다. 아이러니하게 가난이 나의 천운을 만들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절 나는 승무원이라는 천직을 만났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다.

나의 다이어리엔 '행복한 그녀 (나이만큼의 숫자) Page'라고 적혀있다. 늘 인생은 한 권의 책이라 생각했고, 승무원이 되는 순간부터 나는 나를 행복한 그녀라고 칭했다. 즐기면서 일을 하니 월급을 받아도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월급을 많이 주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시절 꿈꾸기 어려웠던 해외여행이 일상이 되니 내 눈앞은 온통 별천지였다. 더 이상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나의 브런치에는 승무원에 대한 애정 가득한 글들을 올릴 예정이다. 가난했던 승무원이 천직 승무원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비행 중 겪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들이 담길 것이다. 그리고 승무원이 되고 만난 빛나는 모든 순간을 기록할 것이다.


나의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글이 되기를 바란다.



가난한 승무원이었던
나는 말하고 싶다.

가난해도 승무원이 될 수 있다고,

처음부터 꿈꾸지 않아도
승무원이 될 수 있다고.

우연의 모습을 하고 찾아온
불행도
이겨낼 수 있다고

나 또한 그러했다고



가난한 승무원이었던 나는 꿈같은 일상을 살고있다.


내가 승무원이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저의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과 고마운 571명의 구독자님들께
감사인사 전합니다.
좋은 글 쓰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이미지 출처: Unsplash, 비행하고 글 쓰는 행복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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