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무는 공무원 시험을 최종 합격하고 몇 개월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며 보냈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었으나 해외에 머무는 중에 인사발령이 날까 봐 그냥 국내에 있으면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노는 것도 어머니에게 눈치가 보여서 이대 앞 스타벅스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인사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9시까지 정부중앙청사(현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라는 연락이었다.
이사무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어머니와 함께 주거비가 싼 용인으로 이사를 했다. 그래서 광화문까지 출근하려면 광역버스로 1시간 30분이 걸렸기 때문에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첫 출근 준비를 했다.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려 정부중앙청사로 걸어가는데 외벽 담장에는 태극기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청사 주변을 경찰들이 지키고 서있었다. 중앙청사의 대문을 통과해 들어가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애국심과 자부심이 솟구쳐 올라왔다. 국무총리와 여러 장관들이 있는 그곳에서 함께 근무를 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인사담당자가 지정해준 장소로 가자 신입 동기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고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임용장을 받았다. 그리고 부서를 배정받아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근무를 시작했다. 이사무가 일하게 된 부서는 정부청사를 새로 건립하는 부서로 설계와 공사의 관리를 하는 기술직 공무원들이 주로 근무하는 부서였다. 당시 과장님은 그 기관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분으로 한번 불려 가면 한 시간 이상 큰소리로 혼나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회의가 시작되면 3시간 이상 걸릴 때도 많았다. 휴일에는 갑자기 사무실에 출근해서 공사현장에 전화를 걸어 현장 상주직원이 출근했는지 확인하고 여름휴가철에는 현장 상주직원의 휴가 중에 비상대기를 지시해서 복귀하도록 만들었다.
이사무가 처음 인사를 드렸을 때 과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공무원은 항상 교도소 담장 위에 있다고 생각하면 돼. 까딱 잘못하면 바로 쇠고랑 차는 거야. 명심해"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과 계장님들이 전부 과장님을 무서워하고 싫어했지만 이사무는 애국심과 자긍심이 넘치는 신규직원이었기 때문에 불만 없이 과장님의 지시사항을 수행했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출근해서 언론보도 스크랩을 출력해서 믹스커피와 함께 가져다 드렸다. 외부에 정보화교육을 다녀와서도 과장님이 배우고 온 것을 업무에 적용해보라고 하면 파워포인트를 활용해서 새로운 자료를 만들어 부서 전 직원 앞에서 발표를 하였다. 특별히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명절 연휴 때 사무실에 나와 발표자료를 만든 적도 있다. 이사무는 공무원증을 매고 정부중앙청사로 출근한다는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고 무슨 일을 하든 새롭고 즐거웠다.
그렇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이사무도 어느덧 3년 차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용인에서 광역버스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사무는 늦은 밤까지 야근을 하고 버스에 앉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더 이상 나의 삶에 큰 변화는 없겠구나. 공무원으로 들어온 만큼 60살까지 이직도 없을 것이고 지난 3년처럼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며 평생 일하다 죽겠구나"
이사무는 갑자기 인생의 허무함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 그대로 감당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피곤함에 잠이 들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무기력함이 느껴지는 슬럼프의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1년 후 주사보에서 주사로 첫승진을 하게 되었다.
악명 높았던 이사무의 첫 과장님도 퇴직 시기가 다가와 다른 기관으로 가게 되었다. 이사무가 과장님이 마지막 택시 타는 곳까지 배웅을 하였다. 그때 과장님이 이제 공직생활의 초기에 있는 이사무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하고 떠나셨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절대 적을 만들지 마라"
누구보다 조직 내에서 많은 적을 만들고 그들과 경쟁하며 힘들게 버틴 분인걸 알기에 이사무의 가슴속까지 그 충고의 진심이 느껴졌다. 물론 그 충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이후 조직생활을 하며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