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아하는 장소요, 회사요
새벽 네시반 첫 번째 출근을 한다. 방송을 하고 사후미팅 보고서만 쓴 뒤, 집에 돌아와 아침을 차린다. 아이들을 뽀뽀로 깨우고 뭐라도 먹여 학교에 보낸다. 새벽에 출근한 엄마가 등교 준비 또한 해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회사 앞으로 이사 온 이유이다.
오후 1시 59분 카톡.
"피디님. 9번 룸입니다."
"앗 세시로 착각했어요."
"얍~~~"
"죄송해요. 내 이름 달고 커피 마시고 있어요."
리클라이너에 누워있다가 용수철처럼 점핑해서 외투만 걸치고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정확히 14:04 도착. 5분 만에 출근. 집이 회사 코앞이면 늦어도 애교롭다. 엘베만 바로 와있었어도 3분 컷이었는데. 미팅 시간에 늦는 일은 잘 없지만, 행여 놓쳤다 해도 5분 만에 뛰어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 축복이다.
홈쇼핑 PD와 쇼호스트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다. 각 배정받은 시간표에 따라 자율적 출퇴근을 한다. 워낙 들쭉날쭉 시간대 근무를 하기에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다. 웬만하면 모두 출근하는 날, 방송시간 전후로 미팅을 잡고자 한다. 편성표가 나온 날, 즉시 미팅 시간을 조율하는데 참 까다롭다. 아마 가장 힘든 업무 중에 하나일 게다. 보통 가장 경력이 많은 사람이 제시한 일시로 연차 어린 친구들이 맞춘다. 특히 쇼호스트는 선후배 관계가 수직적인 편이라 메인 쇼호스트가 넘겨야 서브 쇼호스트의 발언권이 생긴다. PD 눈치 보랴, 쇼호스트 선배 맞추랴, 미팅 하나 잡는데도 보통 에너지가 쓰이는 게 아니다. 물론 안 그런 MZ들도 더러 있지만.
"나는 집이 가까워요. 언제든 맞출 수 있어요."
요즘 내가 채팅창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방송과 미팅 텀이 길면 집에 갔다 오면 되니까. 가장 연식이 오래된 PD가 이렇게 나오니, 내 방송 미팅은 일사천리로 잡힌다. 첫방을 해도 저녁미팅 쌉 가능. 막방을 해도 오전미팅 오케이. 나로 인해 들쭉날쭉 쇼호스트들이 조금이라도 편한 시간대 약속을 잡을 수 있다면, 일주일의 깝깝한 편성표 중 자기를 위한 쉼을 하루라도 챙길 수 있다면 아주 좋겠다. 나의 이사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했다.
방송하러, 미팅하러, 자막 쓰러. 때때로 후배들과 수다 떨러. 이렇게 하루 세 번 이상 출근하는 여자가 되었다. 회사가 가깝고 쾌적해서 회사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벌써 다 왔다고. 얼마나 즐거운지. 작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휴직했을 당시, 처음으로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받았다고 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PD 선배도 그만두어야 했다. 피바람이 끝나고, 나는 운 좋게 복직했다. 해맑게.
"언제 그만두라고 할지 몰라서 2년 전세로 왔어요. 가능한 한 열심히 다녀볼게요. 이 즐거움을 오래 누리고 싶어요."
최근엔 월요일마다 딸과 회사 11층 북카페에서 공부를 한다. 딸이 다니는 영어도서관에서 화요일마다 단어시험을 보는데, 그렇게 우리 회사 북카페에서 잘 외워진다고. 높은 천장과 은은한 조명, 편안한 소파와 바 테이블, 통창너머 마곡 뷰를 즐길 수 있는 공간. 안정된 자세로 공부할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도 구비되어 있다. 사실 대부분 퇴근한 저녁 8시, 우리 둘이 고요하게 마주 앉으면 나도 책이 쑥 잘 읽힌다. 그 공간의 온도와 습도와 조명의 밝기까지도 우리를 몰입하게 한다.
"마곡 이사 와서 좋지?"
"응."
"엄마는 일해도 너희랑 많을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근데 엄마 요즘 브런치작가한답시고 바빠. 더 바빠."
"아,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