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건강해질 결심
“내년부터 [건강한 아침] 맡아라.”
“네? 갑자기요? 저 1월에 제주도…”
“설 전에 제일 매출 좋을 때 휴가라니 제정신이냐?”
“아이들 방학이라…“
[건강한 아침]은 건강식품 특화 PGM으로 우리 회사 간판 프로그램이다. 2년 전부터 능력 있는 후배들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끌어온 방송인데, 지쳤나 보다. 조용히 첫방이나 하던 늙은이가 맡게 되다니. 나도 하기 싫다고, 다른 거 기획해 보겠다고 버틸 만도 한데, 이상하게 설렜다. 건강, 내가 고객들과 가장 궁리해보고 싶었던 주제. 어쩌면 내 피디 인생에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잡아두었던 얼리버드특가 비행기표를 미련 없이 바로 땡 취소했다.
함께 진행하라고 전달을 받은 L과장은 휴가 다녀오자마자 입이 튀어나왔다. 팀장님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하라고 엄명을 하셨기에 더욱 날뛴다.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시는 건 아니죠."
"그렇지. 미리 언질을 주시거나 했으면 좋았을 텐데."
"단물 다 빼먹고 잘 나가지도 않는 걸 받으라고."
"그렇다기보다는 2년 넘게 했으니까 걔네도 지쳤고."
"선배님이랑 저랑은 방송 스타일도 다르고."
"어?"
"그찮아요? 우리 둘은 다른데."
"달라? 그럼 서로 배워가면 되지."
처음 팀장님께 통보받았을 때 너무 일방적이라 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도 위기는 곧 기회니까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같은 처지인 L과장 푸념을 듣다가 맥이 빠졌다. 방송 스타일도 다르고. 선배님이랑은 다르고. 우리 둘은 다르고. 다르고. 다르고. 다르고. 이게 무슨 의미일까?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아팠다. 이 친구도 빠릿빠릿한 후배들 데리고 새로운 기획을 해보고 싶었겠지?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굿파트너가 못되는구나, 제길. 그래도 그 순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서로 배워가자는 재치 있는 말을 뱉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내년에 벌써 20년 차 피디가 된다. 슬프게도 나는 내놓을만한 특화 PGM을 연출해 본 적이 없다. 서브로 도움을 주거나 남이 하던 걸 대타로 받은 적은 있어도, 내 이름 걸고 소문난 프로그램 하나 제작해 본 역사가 없다. 그런 티 나는 걸 해야 경쟁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들어오고, 승진도 쭉쭉하고 하는 건데, 왜 그렇게 무능력하게 조용히 회사만 다녔을까?
일반 PGM은 미팅하고, 자막 쓰고, 영상확인 정도의 업무로 이루어진다면, 특화 PGM은 오프닝기획, 프로모션 협의, 진행 차별화 등 업무가 배가 된다. 자막도 영상도 매회 참신하게 새로운 것을 계속 창조해 나가야 한다. 프로그램을 고객들이 기억하고 찾아올 수 있게 일관된 정체성을 부여하고, 세트, 의상, CG의 톤 앤 매너를 맞춘다. 셀럽 프로그램은 연예인 게스트의 대본을 미리 작성하기도 하고, 실사용기 영상을 수시로 업데이트한다. 진행자가 특출 나지 않다면_회사에 예산이 없다면_쇼의 얼굴이 없는 대로 더 색깔을 내야 하니까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태워 쇼호스트들과 고민하고 고객들을 설득해 나가야 할 것이다. 모두가 매출을 기대하는 가장 좋은 시간대, 가장 좋은 프로모션을 장착하고서.
토요일 오전 고정 PGM을 운영한다는 건 개인적으로도 사악하다. 앞으로 1년간 주말여행은 반납이라는 말이다. 매주 토요일 새벽부터 회사밥을 먹고 회사커피를 마시고 사후 미팅까지 다 끝내고 나면 점심때가 될 것이다. 바로 퇴근을 한다 해도 피로가 몰려오겠지. 토요일 오후는 집에서 퍼져야 회복이 좀 될 테야. 그나마 일요일은 방송이 없을 테니 당일치기로 가까운 교외는 다녀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강원도 내 땅 홍천 주말농장까지 갔다 온다는 건 무리다. 아, 내년 농사는 글렀다. 얘들아, 엄마 토요일마다 사라질 거 같아. 응 뭐라고? 즐거운 토요일이라고! 이런.
오랜 세월 일하면서 얻게 된_아직 어린 PD들에게는 없는_나만의 강점이 있다면 그것은 '여유와 친절함'이다. 이제는 안다.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쏟을 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PD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경청'이라는 것을. 업무의 강도는 3배 이상 높지만, 나 혼자만의 아이디어 구현을 하는 게 아니라 전혀 겁이 나지 않는다. 의욕만 있었던 과거의 나와는 다르다. 하나하나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면서 도움을 받고 감사로 갚아나가면 될 테니.
"새 로고 급해서요, 언제까지 해 줄 수 있겠어요?"
"프로필 찍어야 하는데, 촬영 비는 날 있어요?"
"분장, 의상은 의뢰했는데, 미술팀장님이 한번 더 챙겨주셨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전화를 돌리고, 이모티콘을 뿌리고, 층마다 뛰어다니며 두 손을 맞잡는다.
"PD님, 경품이라도 더 만들어 볼게요."
"쇼호스트 바꾸는 거 힘든데, PD님만 믿고 갈게요."
"다른 음향들이랑 상의해서 시그널 의견 드릴게요."
각 스텝들의 의견을 이끌어내고, MD와 협력사의 신뢰와 지지를 뽑아 쇼호스트들에게 희망을 속삭인다. 모두가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 다소 부정적이고 의욕 없는 L과장도 나와 일하며 회사가 즐거워지는 마법을 느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는 내년이 될 것 같다.
더 건강해지고 싶다는 생각,
건강한 아침+
새해부터는 [건강한 아침+] 브런치북으로 매주 목요일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하루 세 번 출근하는 여자]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첫 연재를 무사히 마칩니다. 언제나 건강한 가치를 전하는 건강한 PD이고 싶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