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꺼운 손가락 Oct 28. 2020

어린이 오케스트라

플라잉 휠체어 48화

시간이 지나면서 일은 점점 커졌다.





48. 어린이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의 인원이 점점 많아지고, 연주도 많이 하게 되면서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한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많아졌다.

시간이 없다. 능력이 안 된다. 그렇게까지는 무리다. 나도 좀 쉬자. 별의별 핑계를 대고 피했지만, 늘 그랬듯.

연습시간을 조율하고, 학생들과 학부모들과 연락하겠다는 사람, 악보를 준비하겠다는 사람, 파트별로 학생들 연습을 봐줄 선생님들, 열심을 다해 섬겨 줄 자원봉사자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무언의 압박을 보내고 있다.

가만히 보니, 나는 그저 그동안 내가 배우고 알게 된 것, 느낀 것을 알려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어린이 오케스트라는 시작되었다.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리 애가 장애가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데 그 오케스트라에서는 우리 아이를 받아 주실 수 있나요?”

“네. 오디션 볼 곡목을 하나 준비해서 오시면 됩니다.”

“다른 곳에서는 된다고 했다가 막상 가보니 안 되겠다고 한 적이 있어서 아이가 많이 실망한 적이 있어요. 그랬는데 아는 분이 여기는 우리 애를 받아 줄 거라고 연락해보라고 해서 전화드렸어요. 진짜인가요?”

“아. 그럼, 우리 어린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걸 보신 적은 없으신가 보군요?”

“네. 본 적은 없어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여기 지휘자에 대해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네. 소개해 주신 분이 그냥 이 번호로 전화해보라고 하셔서요.”

너털웃음이 났다.

“우리 지휘자도 휠체어를 타고 다닙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아이를 데리고 오세요.”
 

내가 너무나 자신 있게 대답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의 대답은 동일하다.

“나를 보세요.”


우리 오케스트라 안에는 장애 학생이 늘 4~5명 정도가 있다. 비장애인 학생들은 장애인 친구와 대화하고 연습하면서 자연스레 돕는 법을 배우고, 장애학생도 자신을 편견 없이 봐줄 친구를 사귀게 된다. 장애 어린이들에게 비장애인 친구 사귀는 것은 일반 학생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인생에 더 큰 의미가 있다.


나는 국민학교 때 싸움으로 시작해서 친구를 사귀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마저도 중학교를 가지 못하면서 청소년 시절에는 재활원 친구들뿐이었다. 사춘기 시절의 예민한 아이들이 오케스트라 안에서 잘 어울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뭉클하고 옛날 생각도 많이 난다.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전투적이었던 내 10대 시절에 대한 위로다.


처음에는 20~30명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좋은 오케스트라가 되기 위한 기초 작업에 시간을 많이 할애했다.

오케스트라를 하려면 내 소리보다는 함께 연주하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하고, 혼자 튀는 것이 아니라 내 소리와 다른 사람의 소리가 섞여서 또 다른 소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악보를 보고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들어왔다가 점점 심화되는 연습에 버거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함께 하는 즐거움과 감사함을 누릴 줄 알기에 금방 적응을 해냈다.

양로원, 병원 등을 다니며 위문공연을 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스케줄을 조정해야 할 만큼 연주가 많아졌다. 어린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연주하니 보는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하고 좋아하고, 관객의 그런 모습을 본 아이들도 긴장 풀고 음악에 집중하니 좋은 연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28년이 지나면서 대략 800~900명의 학생들이 이 오케스트라를 거쳐 갔다. 아이들의 변화와 발전은 말할 수 없이 엄청난 기쁨과 감사다.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큰 그림을 가지고 시작한 사역이 아니었다. 그저 자그마한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역자도 주시고, 사명감도 주시고, 차고 넘치게 지원자를 보내주셨다.


나는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아이들이 변화 발전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내 인간적인 욕심과 능력으로 했다면 과연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참여하고 싶어 했었을까.


아이들을 가르칠 때면, 강민재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난다. 우리에게 보여 준 선생님의 그 사랑을 그때보다 지금 더 깊이 느낀다.

나는 근사하게 마련되어 있는 연습실로 학생들을 불러 모다. 학부형들과 자원 봉사자들이 악보를 준비해주고, 연습 일정을 조율하고, 연락도 해주고, 간식까지 챙겨준다. 이 천사들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한다.


그 옛날 강 선생님은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먼저 찾아와 주셨다. 교통도 불편하고, 시설도 낙후되었고, 음악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와서 음악을 들려주고,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음악회장에도 데리고 가고, 자원 봉사자 선생님들을 설득해서 데려 오셨었다. 그뿐인가 악기에 관심이 없다는 나 같은 학생들까지 설득해서 악기를 배우게 했다.


자기 하나 먹고살기도 힘든 그 시절, 장애인이라고 하면 천벌을 받은 사람들, 전염병 옮길 거 같은 사람들로 멀리하던 시절에 어떻게 몇 년이고 우리를 위해 그런 사랑을 베푸실 수 있었을까.

재활원의 모습을 보게 되면 누구나 측은지심이 들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꽤 많은 돈을 헌금해서 악기를 사 줄 수도 있다. 한 번쯤 와서 레슨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강 선생님은 한 달에도 몇 번씩, 다른 선생님들까지 더 데려와서 몇 년이고 가르쳤다. 선생님 덕분에 인생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다. 음악을 통해 웃을 수 있었고, 음악으로 무장하고 나를 깨고 나왔으며, 음악 때문에 친구도 동역자도 얻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이 모두 바뀌었다.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은 평생을 통해 말할 수 없는 눌림과 슬픔, 아픔과 괴로움이 있다. 그런데 음악을 통해 내 인생이 바뀌고, 영혼이 바뀌고, 스스로 살아갈 힘이 생기자 내 가족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이 생겼다.


음악에는 이런 힘이 있다.

이걸 생각하면 내가 어린이 오케스트라에 집중해야 할 이유는 더 이상 이유가 아니라 당연한 것일 게다.


여기는 이제 내가 없으면 안 될 거 같다.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갈 때가 간혹 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기도 한다.

“이 선생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저런 일들을 다 하시지?”

“보고 있으면 장애인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니까?”

“선생님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듣기 좋은 소리다.

다 들어놓고도 안 들린 척하기도 하고, 차마 고개를 돌려 인사를 하기도 쑥스러울 때가 많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데, 사람들이 이제야 알아보기 시작하는군.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간혹 이런 생각이 들라치면 여지없이 성세 재활원에서의 내 모습이 툭하고 튀어 오른다. 내가 어떻게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도 되새겨 본다. 아무리 삭제를 눌러도 지워지지 않는 팝업창처럼 과거의 모습들이 파노라마로 돌려진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내게 아낌없이 부어 주었다.

무엇인가 돌려받을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말이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더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땐 무조건 받아먹기만 했다.


나는 과연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내어 주고 있는가?


이전 18화 지휘자가 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