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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꺼운 손가락 Oct 28. 2020

은퇴

플라잉 휠체어 49화

2013년




49. 은퇴



서른네 살에 들어와 쉰일곱이 되었다. 지판 위를 움직이는 내 손가락 마디마디에 주름이 가득하다.

무대를 향해 휠체어를 굴리는 내 팔 힘이 예전 같지 않음을 동료들도 느끼고 있었다.


12월 12일의 정기연주회가 수원시향에서의 나의 마지막 연주로 결정되었다.

2013년이 바그너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정기연주회 곡목은 모두 바그너의 곡으로만 연주를 하게 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장미의 기사> 모두 내게 뜻깊은 곡이 되었다.


30대 때 연주했던 곡들을 60을 바라보며 꺼내보니 젊은 시절엔 느낄 수 없었던 인생의 깊이에 대해 바그너가 말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보다는 지난 시절에 감사함이 더 컸기에 마지막 연주는 연습과정 동안 매일매일이 너무 소중했다.


마지막 음이 끝나고 동료들은 나를 바라보며 박수를 보내주었다.

관객들은 알 수 없는, 무대 위의 연주자들만의 따스함이었다.


연주가 다 끝나고 그날 밤 정주영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모든 남자단원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연주가 끝나면 더러 연주자들끼리 뒤풀이를 하곤 하는데, 여러 가지로 불편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뒤풀이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늘 아쉬워하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아내가 나를 위해 은퇴 기념 뒤풀이를 마련해주었다.


좁아터진 집에서 바글바글.

마지막이었지만 아무도 마지막이 아닌 듯, 오늘의 연주에 대해 얘기하고 올해의 연주들이 어땠었는지, 내년 시즌에 올려질 공연들에게 대해 얘기했다.


30년 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의 서울 첫 연주 날이 떠올랐다.

연주자는 나였음에도 정작 사람들 속으로 섞이지 못했던 그날.

이제 더 이상 이 사람들과 연주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동료다.


“내년엔 연주가 더 많아진다고 하던데.”

“내가 은퇴하니까 수원시향이 더 잘 나가는 거 아냐?”

“무슨 은퇴야. 누구 맘대로. 내일 안 나오시면 결근처리합니다.”

“맞아. 아시죠? 무단결근 사흘이면 해고!”

“파트 연습 있으니까 일찍 오세요.”

“야. 시끄러. 선생님 어깨가 불쌍하지도 않냐. 근육이 너덜너덜해졌을 거야.”

“그거 모닝커피 한잔이면 말짱해져.”


누군가 그랬던가. 못 견디게 지긋지긋한 시간도, 행복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도 결국은 다 지나간다고.


이런 바보 같은 농담들이 얼마나 그리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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